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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1-12-12 17:59:00, Hit : 304, Vote : 112
  토요 살롱 340회 " 반세기를 넘게 사랑한 친구, 혜인아, 명복을 빈다."

혜인이가 결국은 12월 5일 자정을 조금 지나 운명했다.
2016년 12월 말에 자신의 병명을 알았으니까 만 5년 간 병마의 고통에 시달렸다.
혜인이의 추모사를 쓰려니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아무래도 여러 번에 걸쳐 나누어 써야 할 거 같아
우선 지난 해 8월 21일 요양병원에 입원한 이후부터 사망 시까지,
가장 최근의 일을 정리하는 걸로 시작하려고 한다.
그런데 다음 주말에는 지방을 다녀와야 하고 그 다음 주 24일에는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
내년 1월 20일에 돌아 올 예정이니까 추모사 2회는 그 이후에나 쓰게 될 거 같다.
그러니까 금년 토요 살롱도 조 혜인 추모사 그 첫 회로 마감하고자 한다.

혜인이를 마지막으로 집으로 찾아가 본 게 지난 해 6월 말이었다.
흥수와 병우가 동행했었다.
그 이후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음식물을 삼키지 못하게 되자  
우리가 다녀간 지 두 달도 채 안 된 8월 21일,
집 근처이고 녹번 역에서 마을버스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효’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우리가 갈 때만하더라도 음씩을 씹지는 못하더라도 유동식을 빨대로 흡입할 수는 있었는데
흡입기능조차 잊어버려 코에 관을 끼워 음식을 투입해야만하게 되었다.

나도 혜인이가 발병 후 그런 병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지만
혜인가 투병한 혈관성 치매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 뇌를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뇌 세포 하나하나에 피와 산소를 공급하는
모세 혈관이 터지면서 그 혈관과 연결된 세포가 죽게 되어
그 세포가 관장하는 우리 몸의 기능도 정지되는 무서운 불치병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단지 기억력뿐 아니라 우리가 서고 앉고 걷고 움직이고 말하고 씹고 삼키고
소화하고 하는 모든 기능이 무순위로 정지되는 병이다.  

코로나로 대면면회가 허락되지 않다가 11월 초에 혜인이 부인으로부터
12월에 대면면회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병원에서 받았다며
12월 8일 면회 예약을 했으니 같이 갈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마침 그 날 신촌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지만 면회 예약시간이 오후 4시이지만
면회 시간이 10분밖에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저녁 약속에 별 지장은 없을 거 같았다.
그러나 면회일을 이틀 앞두고 혜인이 부인이 거리두기가 격상되어 대면면회가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병원으로부터 받았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결국 입원 이후 혜인이 부인이 일주일에 한번 영상 면회는 했지만
대면면회 한 번 못 해 보고 해를 넘겼다.

12월에는 내가 미국에 갔다 1월 중순에 돌아와 2주 자가 격리를 마치니 바로 설이고
그러면서 후딱 2월이 지났는데 3월 초에 그 동안 연락이 뜸했던 혜인이 부인으로부터
3월부터 한 달에 두 번 대면 면회가 가능하다고 병원에서 알려왔다며 같이 가겠냐고 하기에
3월 마지막 토요일인 27일에 같이 면회 가기로 날을 잡았다.

오랜만에 보는 혜인이는 피골이 상접하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누군지 알아 는 봤다.
비록 말은 못하지만 옛날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친구들 근황을 이야기해주면
얼굴의 표정도 바꾸고 입가도 올라가고 고개도 끄떡였다.
그러다 가끔씩 눈을 치켜뜨고 똑바로 쳐다보는 커다란 눈망울에는 뭔가 간절함이 비쳤다.  
면회를 마치고 시간이 어지 중간해 차집에서 커피 한잔을 한 후
냉면 집에서 반주 곁들여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혜인이 부인이 감정을 추스르지 못 해
이따금씩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너무나 애잔해 마음이 쓰라렸다.
4월에도 두 번 대면 면회를 할 수 있는데 한 번은 친척 중 한분과 같이 가기로 하였다고 해
한 번은 나하고 같이 가기로 했다.

부인이 혜인이 절친 김 한성에게 연락하여 가능하다면 같이 가자고 하겠다고 하여
그러자고 했고 다행히 한성이가 그 날 갈 수 있다고 했다며 원래 면회가 두 명밖에 안 되지만
부인이 병원에 특별히 부탁하여 세 명 면회를 허락받아 4월 11일 두 번째 면회를 다녀왔다.
혜인이 상태는 3월에 봤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친했던 한성이를 보고도 별 반응 없이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면회를 마치고 지난번에 갔던 차집에서 커피 한잔을 한 후 한성이는 먼저 가겠다며 일어나
부인과 둘이서 차돌 배기 전문점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부인도 맥주를 좀 마셨지만
나는 마음이 울적해 소주 한 병을 맥주와 섞어 다 비웠다.

그리고 5월에도 두 번 면회를 할 수 있지만 동행자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여
친구들 중 두 명과 날짜를 달리해 면회를 하기로 하고 그나마 혜인이와 친분이 있던
최 명식이와 오 성진에게 의사타진을 하였더니 다들 좋다고 하여
5월 첫 일요일인 5월 2일에는 오 성진이와 그 다음 주 일요일인 5월 9일에는 최 명식이와  
면회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한 달도 안 된 사이에 혜인이 상태는 급격히 악화 되어 있었다.
오 성진이를 알아보고 눈가가 축축해졌고 최 명식이를 보고는 시종 눈물을 흘렸다.
성진이는 면회 후 커피 한잔 마시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일어섰지만
명식이는 차돌 배기 집에서 나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소주를 흠뻑 마셨다.

부인이,
‘조 박사님이 어떻게든 금년은 넘겨 그래도 일흔까지는 살았으면 합니다.’ 하자,
명식이가 정색을 하며,
‘그 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하기야 4월에 한성이와 면회 후 부인과 둘이서 저녁을 하며 부인에게
‘이제는 마음의 정리를 해야 할 때가 된 거 같다.’며
‘그렇게 오래 갈 거 같지 않으니까 혜인이를 집으로 데려가
얼마간이라도 마누라 곁에 있다 임종을 하게 하는 게 어떠냐.‘ 라고 했더니
‘심각히 생각해보겠다.’ 고 했는데 얼마 후 연락이 왔다.
‘생각해 봤는데요, 집으로 데려오면 얼마 못 가시거든예. 그건 저도 알아예.
그러고예, 임종을 저 혼자 할 거라니까 너무 무서워예.
혼자서 감당이 안 될 같아예.‘
그러면서 병원 측의 권유로 한 달에 두 번 2주 간격으로 영양주사를 투입한다고 했다.

6월 초에는 평소에 혜인이가 너무 착하다며 친척 중에 제일 좋아했다는
가톨릭 병원 간호사라는 사촌 시누이와 면회를 간다고 했고
사회학과 동기 친구들과도 일정이 잡혀 있다고 했다.
희경이가 서울 대 사회학과 동기 모임 간사로서 연락을 맡고 있다.
나는 6월 중 도미했다 7월 중순에나 돌아 올 거라 6월에는 면회에 동참할 수 없어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고 7월 중순에 돌아오니 또 면회가 중단 되어 있었다.

혜인이 상태를 물어보니까 일주일에 한번 영상면회를 하고 있는데
내가 면회 갔을 때보다 살도 좀 오르고 컨디션이 좋은 날은 반응도 보이고
말도 좀 한다고 했다.
면회를 다녀 온 사촌 시누이가 상당히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며
목소리도 밝았다. ‘최소한 금년은 넘기실 거 같아예’
어쨌든 내가 없는 사이에 무사해 안도를 했고 부인의 소망대로 금년은 그럭저럭 넘기거나
혹 더 이상 버틸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기대도 하게 되었다.

본인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지만 부인은 혼자되는 게 아직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는 모습이었다.
혼자되는 걸 두려워도 하고 과부라는 타이틀을 못 견뎌했고
자신에게 쏟아질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하기야 결혼 3년 만에 남편이 불치의 병에 걸렸으니 그 심정 헤아리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둘 다 만혼이었다.
결혼 시 혜인이는 환갑의 나이였고 부인은 그 보다 17세 연하였지만 마흔이 넘은 만혼이었다.
게다가 둘 다 초혼이었다.
하지만 발병하기 전까지는 나이가 무색하게 소꿉장난 같이 웃기지도 않은 일로
투덕대기도 하고 깨가 쏟아지기도 하고 가까운 주변에 서로에게 불만을 일러바치기도 하던,
어께를 마주하고 나란히 걷는 뒷모습이 유난히 다정해 보이던
18세 철부지 신혼부부와 다름없었다.

그러면서 유난히 더웠던 7,8월 여름이 지났고 9월 초 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추석 연휴기간 중에 가족에 한해 한번 특별 대면 면회가 허락된다고 하니
같이 갈 수 있냐고 해 추석 직전 일요일인 9월 19일 오후 4시로 일정을 잡았다.
면회 전에 유료로 병원에서 간략하게나마 코로나 테스트를 거쳐 음성 확인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혜인이 상태는 부인이 7월에 상태가 좋아졌다고 했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면회 온 지난 5월 보다는 훨씬 악화되어 있었다.
몸을 전혀 가누지 못 해 휠체어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눈도 뜨지 못 했다.
간호사가 억지로 눈꺼풀을 벌렸으나 벌린 상태를 전혀 유지하지 못했다.
바로 내려 앉아버렸다.
몸은 뼈와 가죽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아무리 불러도 아무리 소형 마이크에 대고
큰 소리로 별 이야기를 다 떠들어도 대답도 없고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예의 차돌 배기 집에서 이른 저녁을 하며 부인은 소주를 못 마셔 맥주를 마시고
나는 평소처럼 소주에 맥주 말아 제법 많이 마시는 동안 부인이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며
회한에 젖어하는 모습을 그냥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금년은 넘겼으면 해예.’
‘금년 해야 세 달밖에 안 남았는데 그거야 넘기겠지요.’

그러면서 추석도 지나고 유난히 푸른 하늘에 청량하고 상쾌했던 10월도 지난 11월 초
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혜인이 병실 간호사가 코로나 양성 반응이 나왔고 환자 중에도 양성 반응이 나왔는데
혜인이는 현재 음성 반응이지만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 일주일 후인 11월 13일,
혜인이가 코로나 양성반응으로 확진 되었지만 다행이 무증상 감염이란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러면서,
‘조 박사님 보다 상태가 더 안 좋은 환자분들도 코로나 치료 받고 완치되어 나오는 경우도
많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열흘이 지난 후인 11월 22일,
혜인이가 아직 격리 병실에 있지만 증상이 거의 없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상태로 완치되는 경우도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는 동안 나는 미국 다녀오는 티케팅을 했다.
일단은 12월 24일 떠나 1월 20일 돌아오는 일정이다.
부인에게 알려줬더니 ‘떠나시기 전에 조 박사님이 코로나 완치되었으면 하네요.’
티케팅을 했지만 내가 없는 동안 일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걱정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혜인이는 평소 왕래하던 친인척이 거의 없었다.
아들만 4형제지만 큰 형님은 30여 년 전에 작고하셨고
둘째 형도 가족과 함께 수 십 년 전에 캐나다로 이민 간 후 소식이 끊겼고
막내 동생과도 서로 단절한 지 오래되어 막상 일을 치를 상주는 물론 친인척이 전무했다.
부인 쪽도 거의 비슷한 처지였다.

11월이 다가도록 상황의 변화는 없었다.
혜인이는 증상은 없지만 여전히 코로나 양성반응이라고 했다.
그러다 12월 3일 아침에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보통은 문자 교신을 하고 직접 전화는 잘 하지 않기 때문에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가 예의 카랑카랑한 소리는 사라지고 탁하고 갈라져 있었다.

‘저, 조 박사님요, 지금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알릴 데 알리고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마지막 말은 잊지 못하고 흐느낌으로 변해 있었다.
전혀 소화를 시키지 못해 콧 줄을 제거했고 호흡곤란으로
산소 투입에 의지해 겨우 연명하고 있다고 했다.
최 명식에게 전화해 물어보니까 그런 증상이면 금방은 어떻게 되지는 않지만
길어야 3일이라고 했다.

부인이 집에서 가깝고 혜인이 모친상을 치러 친숙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빈소를 차리고 싶어 했으나 알아보니까 빈 방이 없다며 발을 굴렀다.
우선 상조 회사와 빨리 계약을 하라고 하고 집 가까운 병원에 정 자리가 없으면
멀더라도 아산병원으로 가자고 하고 병규에게도 연락을 해 두었다.

원래 3일 가평으로 가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오려고 했었는데
일정을 단축해 하루만 머물고 다음날인 토요일에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부인과는 계속 문자, 또는 전화 통화를 하며 상황을 전해 들었는데
토요일 저녁 8시쯤 병원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라고 해서
방역 복으로 완전 무장하고 보고 왔다고 했다.

그러고 11시쯤 병원에서 오늘 저녁을 넘기기 어렵다는 연락이 왔다고 하였는데
그 때까지도 빈소를 차릴 병원을 못 구해 안달을 하며 초조해 하고 있어야 했다.
요양병원 측에서는 무증상이라 감염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며 확인서까지 써 주었으나
일단은 코로나 확진자라 대형병원은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요양병원에서는 임종하면 즉시 사체를 옮겨야 한다고 하고 장례식장은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병원에서 임종 소식을 알려왔다.

장례식장을 구하지 못 할 경우 장례를 생략하고 바로 화장터로 가자고 부인에게 이야기했으나
이번에는 서울의 두 곳 화장터가 12월 6일까지 꽉 차 있었다.
그러나 서울 시내 모든 장례식장에 문의를 하던 상조회사가
영등포 구청 옆 영등포 병원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고 하여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자정을 지나 12월 5일 밤 12시 15분쯤 임종을 하였는데 그러는 사이
시간은 새벽 2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동기들 단톡 방에 부고를 올리고 총무 대진이에게 문자를 보내니 새벽 2시 반이었다.
앰뷸런스와 함께 장례식장에 도착한 부인이 수속을 마치고 전화를 해
아침 10시 경에 빈소가 차려질 거라고 했다.

첫날인 5일 흥수가 11시 반쯤 제일 먼저 빈소에 도착했다.
흥수는 ‘24회 신우 회’ 명의로 조화도 보냈다.
그러고 대진이가 오후 1시경에 도착했고 이어서 강 희경이가 들어섰다.
sns를 하지 않고 문자도 보지 않는 재억이가 소식을 모를 거 같아 전화를 했더니
역시 모르고 있었다.
재억이는 동옥이, 동윤이, 혜인이와 고교시절 1학년 때 같은 반으로 그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었다. 깜짝 놀라며 바로 오겠다고 했다.
재억이는 목동에 살고 있어 집에서 3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재억이가 오자 바로 술판이 벌어졌고 김 일이가 합세했다.
이렇게 시작한 술판이 문 닫는 시간인 밤 10시까지 이어졌는데
일이는 저녁시간 무렵 자리를 떴지만 재억이는 상조회사 직원들로부터 쫒겨 날 때까지
소주를 들이키며 자리를 지켰고 다음날 다시 오겠다고 했다.

다음 날 오전 10시쯤 성 연철이 첫 번째로 조문을 왔다.
연철이는 최 항목과 더불어 서울 중 시절 혜인이 절친 이었다 고 한다.
나하고는 일면식도 없다가 2014년 혜인이 모친 빈소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조문을 마치고 마스크를 벗으며 처음 건 낸 인사가,
‘아, 송 종호. 너 왜 이렇게 늙었냐. 못 알아봤다.
이제 자세히 보니까 옛 모습이 남아있네.‘
‘미안하다. 못 알아 볼 정도로 늙어서.’

연철이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연철이와 처음 인사를 나눈 2014년에는
머리를 까맣게 염색을 하고 있을 때였다.
2016년 막내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염색을 하지 않고 본색으로 돌아왔으니까
까만 머리로만 기억하다가 백발이 됐으니 놀랄 만도 했다.
연철이는 10분만 있다 가겠다고 하고서는 소주 한 병을 깨끗이 비우고 일어섰다.
일어서서도 못 내 아쉬운지 부인과 빠이빠이만 10분을 하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김해에 거주하는 항목이가 못 온다며 항목이의 부의금도 들고 왔다.

연철이와 소주 한잔하고 있는 동안에 뜻밖에도 김 동윤이 조문을 왔다.
부인이 조심스럽게,
‘동창이라고 하시는데 저는 모르는 분이라 서요.’
그래서,
‘누구?’ 하니까 마스크를 벗으며, ‘나야, 김 동윤.’
동윤이는 그야말로 고교 졸업 후 처음 만났다. 고교 때 모습 그대로였다.
까만 머리 그대로이고 몸매도 그대로이고 얼굴의 주름은 펴져 오히려 더 젊어보였다.
동윤이는 나와 2학년 때 같은 반을 했다. 그 유명한 3반, 이 달모 선생님 반이었다.
동윤이는 졸업 후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찌감치 낙향하여
김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오래 봉직했다.
‘내가 운동을 좋아하니까 애들하고 맨 날 축구만 했어.
술 담배도 안 하고 그래서 아마 덜 늙었는가 봐.
원래 체육시간이 한 시간인데 방과 후에 매일 축구를 하니까 아이들한테 인기 최고였지.‘
동윤이는 원래 체질상 안 받는다며 소주 두 잔만 찔끔찔끔 마셨다.

또 뜻밖의 조문객을 맞았다.
시애틀에 거주하는 이 채인 부인이었다.
친정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코로나로 입국을 못 하다가 뒤늦게 왔다 곧 며칠 후 돌아갈 거라며
남편한테서 이야기 들었다고 했다.
혜인이와 채인이는 고교 때도 친했지만 대학 들어가서
사회학과, 정치학과 같은 문리대를 다니며 유별나게 친했었다.
나도 혜인이로 인해 채인이와 친하게 되었었다.
채인이 부인은 5,6년 전 한성이네 집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마침 귀국해 있던 채인이가
막내아들을 데리고 부인과 함께 참석하여 혜인이 부인과 인사를 나눈 적이 있어
혜인이 부인과는 구면이었다.

연철이가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을 때라 채인이 부인이 동윤이, 연철이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연철이 왈,
‘중학교 때 혜인이와도 짝을 하고 채인이와도 짝을 했는데
나는 까부느라 공부를 억수로 못했지만 내 짝들은 다 서울 대에 보냈지, 흐흐.‘
마침 승헌이도 조문을 와 채인이 부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승헌이는 중 1때 채인이와 짝이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둘의 생년월일이 같았고 둘 다 지지 않으려는 데다
성질이 있어 무지하게 싸웠다고 한다. 지금은 둘이 제일 친하다.

재억이가 점심 무렵 다시 왔고 한성이가 원주에서 오고
통풍 때문에 나들이를 삼가 해 못 올 거 같던 수영이도 왔다.
구 재수도 오고 두환이도 오자 술판이 제대로 벌어졌다.
재억이와 한성이가 문 닫을 때까지 마시며 빈소를 지켜줬다.

서울 대 사회학과 입학동기 20명 중 혜인이까지 3명이 사망했고 한 명은 여자이고
이 해찬 전 총리는 요즘 대선 관계로 자유롭지 않아 참석이 어려워
남은 15명이 참석 가능한데 그 중 13명이 조문을 왔다. 거의 다 온 셈이었다.
입학 정원 20명 중, 우리 동기가 조 혜인, 김 일, 강 희경 등 3명이고 23회,22회해서
모두 다섯 명이 서울 고 출신이라고 한다.

비록 혜인이 친 인척 중에는 조선일보 경제부 기자라는 고종 사촌 동생 한명만이
잠깐 조문을 왔고 부인 쪽에서도 큰 언니가 유일하게 대구에서 올라와 빈소를 지키고
장지까지 동행하고 반혼제까지 참석했고 막내 동생이 잠깐 조문하고
조카사위가 빈소에도 다녀가고 장지까지 자기 차로 와 준 외에 아무도 없었지만
서강 대 동료 교수들의 조문이 이어졌고 제자들도 많이 찾아 와
그런대로 빈소가 쓸쓸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운구를 할 인원이 마땅찮았다.
아침에,
‘저기요, 운구를 할 사람이 여섯 분이 필요한데 조 박사님이 워낙 말라 체중이 안 나가지만
그래도 네 분은 있어야 한다는데요.‘
다들 칠십 노인들이라 딱히 네 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7시 발인이라 6시 반에는 와야 하는데다 코로나라 강요할 수도 없었다.
우선 일이에게 부탁을 하고 재억이에게,
‘집이 가까우니까 니가 좀 와라.’ 했더니 병원에서 운구차까지만 운구하고 화장터에는
가지 않는 조건으로 흔쾌히 수락해줬다.
희경이가 발인에 온다고 해서 장례식장에서 나까지 해서 4명은 겨우 맞췄는데
화장터에서 한명이 부족했다.
다행히 사회학과 동기 중 일산에 거주하는 친구가 벽제로 바로 와 준다고 해서 운구 인원은
그럭저럭 맞출 수 있었다.

벽제에서 화장 후 부인과, 큰 언니, 일이와 넷이서 유골을 들고
혜인이의 발병을 알자마자 부인이 혜인이 큰 형과 모친이 잠들어 있는 춘천 동산 공원 묘원에 일찌감치 마련해 둔 평장 납골 묘에 매장을 하고 위폐를 안치한 백련사에서 반혼제를 마치고
그냥 헤어져 부인 혼자 보내기가 너무 안쓰러워 일이와 셋이서
혜인이가 입원해 있던 요양병원 건물 횟집에서 저녁을 했다.
부인의 눈물과 함께 원망, 회한에 젖은 이야기에 일이가 위로하느라 바빴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매사 조심하는 일이도 소주 한 병을 마셨고
일이가 먼저 일어난 후에도 둘이서 계속 마시다 보니 맥주밖에 못 마시는 부인도
주량을 오버해서 마신 거 같았다.

이틀 후인 삼우제에 큰 언니도 오지 않아 부인과 둘이서 백련사에 가서 제를 지내고
춘천 묘소에 참배한 후 오는 길에 가평 후배 네에 들러 이른 저녁을 먹고
응암 동 아파트 앞까지 데려다 주고 집에 돌아오니 저녁 아홉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혜인이가 뚫어지게 바라보던 커다란 눈망울에 담긴 간절함과 애절함이 뚜렷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있을 때 일을 치를 수 있었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놓였다.  

반세기를 넘게 사랑한 친구, 혜인이의 명복을 빈다.

2021.12.12. 송 종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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