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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17-02-11 16:37:02, Hit : 2343, Vote : 544
  토요 살롱 201회 " 냉전시대의 미국의 대외정책 "

지난주 토요일 저녁 9시 무렵 토용 살롱 200회를 올린 후 겨우 한숨 돌리고
종일 붙어 있던 자판 앞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용혁이가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 무렵부터 아예 컴퓨터 앞에 앉아 이제나 저제나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미국에서 돌아올 무렵부터 토요 살롱 200회 올릴 날짜를
지 마음대로 예견하고 예고도 해 가며 은연중 협박에 가까울 정도로 압박하고 있던 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2월 4일을 넘길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입이 실룩거리고 실실 웃음이 삐져나올 만큼 기분 좋은 압박이었다.
2월 4일 당일 날은 이미 아침부터 역사적인 날이니 어쩌고 하며 분위기를 띄우고
오후 너 대시에는  ‘종호는 지금 독수리 타법으로 열심히 자판 두드리고 있겠지?’
라는 메시지를 단체 창에 올리고 승헌이가 댓글을 달며 기대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물론 그 시간에 뭐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방해를 받을 여유도 없어
폰을 아예 꺼 두고 용혁이의 예견대로 자판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보통 A4용지 5매 정도에서 마무리 짓거나 길어도 6매는 넘지 않으려고 하는데
얼마나 정신없이 두드리고 있었던지 눈도 아프고 목도 뻐근하고 허리도 쥐가 나는 거 같아  
돌아보니까 벌써 A4용지 8매를 넘고 있어 부랴부랴 수정하고 빼고 줄이고 하여
황급히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8매를 넘겨 마무리가 9매 째다. 토용 살롱 역사상 가장 긴 장문이다.

용혁이가 200회 기념으로 토요살롱 첫 회부터 5회까지를 캡쳐 해 동기회 홈피에 올리고
뭐 별 거도 없고 보잘 거도 없지만 토요살롱 200회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도 했다.
2009년 6월에 시작했으니까 벌써 8년 전이다.
50대 중반을 갓 넘는 때라 첫 회 제목도 ‘ 이제 곧 이순이라는데.’ 로
60을 바라보며 쓴 글이었다.

2008년 5월에 조깅하던 중 울타리에서 뛰어내리다 발목과 뒤꿈치 뼈가 산산이 부서져
당시 거주하던 곳에서 가까운 김포 우리병원에서 수술하고 3개월을 입원해 있을 때다.
장기 입원이 허용이 안 돼 두 달 입원하고 일주일 퇴원했다가
다시 입원해 한 달을 더 있었다.
그나마도 깁스에 목발을 하고 혼자서는 생활을 할 수 없는 사정을 들은
담담 의사의 특별 배려 덕분이었다.

많은 동기들이 위문하러 와 줬지만 당시 부평 공장으로 출퇴근하고 있던 용혁이는
평일 날에는 거의 매일 아침 11시면 어김없이 전화를 해,
점심에 누가 병문안 오는지를 확인했다.
없으면 ‘그럼 나하고 점심 같이 하자.’ 하고 와 줬고
있다면, ‘그래 잘 됐네. 덜 적적하겠구나. 점심 잘 먹으라.’

그러던 용혁이가 내가 8월 말에 퇴원하자 이번에는 지가 입원했다.

처음 시작할 때 가장 기뻐해주고 격려해 주었고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왔을 때도
‘토요살롱 쓰고 있니?’ 축 가라앉은 특유의 묵직한 저음 한미다로 자판에 눌러 앉히고
눈 부릅뜨고 정신 차리게 한 후
시시각각 문자로 전화로 툭툭 한마디씩 해 주며 같이 밤을 새 주었다.

처음에는 글을 읽고 용혁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다음 회를 쓰게 되었고
회를 거듭하면서는 용혁이의 독후감을 듣고 싶어 또 쓰게 되었다.
당초 10회 정도를 목표로 했다가,
‘야, 송 종호, 너 그 정도야? 겨우 열 번 쓰려고 시작했냐. 그러려면 당장 그만 둬.
50회는 써야지.‘
50회를 넘기자, ‘이왕 시작했으니 100회는 채워야지.’
100회를 넘기자 목표를 아주 멀찌감치 잡아버렸다.
‘종호야, 너 1,000회를 써야 한다.’
그러고 1,000회 란 말에 경악한 승헌이에게 아주 친절하게 앞으로 소요될 시간을 계산해줬다.

“200회를 쓰는데 7년 반이 걸렸으니까 800회를 더 쓰는데 30년,
우리나이 90대 중반, 그래도 100살 이전. “

이렇게 허무맹랑하게 느긋하고 일방적이고 무지막지한 반면에 미적 감각이 탁월하고
감성이 섬세하고 무엇보다 의리를 중시하고 마음이 따뜻한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나에게 과분한 복이자 행운이다.

그런데 200회를 쓰다 너무 길어져 황급히 마무리하고 말아 뭔가 미진해
속편을 써야하나 어쩌나 하고 있는데 애들 엄마가 올리자마자 득달같이 읽어본 후
‘일부만 올린 거 같다’ 는 독후감을 보내왔다.
용혁이와 상의하자 흔쾌히 ‘오케이!’ 였고
그저께 저녁 늦게 한잔하고 혀가 꼬부라져 전화한 두환이가
200회를 읽어보고 자기도 정리가 되는 거 같다라고 하기에 ‘속편을 좀 더 쓸까?’
했더니 흔쾌히 ‘더 써라’ 였다.
그래서 미국 이야기를 몇 번 더 쓸까한다.
물론 되도록 기록이나 입증된 사실에 근거를 하겠지만 대체로 내가 꼴리는 방향이 될 거니까
이 점 미리 양해 바란다.

2차 대전 이전까지 자기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다른 유럽의 열강 제국들에 비해 자기 나라밖의 일에 상대적으로 수동적이었던
미국의 대외 정책이 대전 후 적극적인 대응으로 선회하였다.
바로 볼셰비키의 확산을 저지해야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란 말은 레닌이 30세 되던 1900년 시베리아 5년 유배형을 마치고 독일에 망명하여
이미 망명 중이던 러시아 공산주의 대부인 플레하노프, 트로츠키, 마르토프 등과 합류하여
1898년에 결성된 ‘민주 사회 노동당’ 의 기관지 ‘이스크라’(불꽃)을 편집하면서
당규와 편집인 구성에 대해 격론이 벌어지고 결국 투표에 붙여져 25대 23의 근소한 차이로
레닌이 이김으로써 자기파를 볼셰비키(다수)로 부르고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상대방을
멘셰비키(소수)라고 일컬으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완수라는 목표는 동일하지만 역사의식과
투쟁방법에 있어서 사사건건 부딪치게 된다.
혁명이 완수되고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실제로는 멘셰비키가 압도적 다수였고
볼셰비키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본질적인 차이는 멘셰비키는 순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일차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거쳐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2차 혁명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해야한다는데 반해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혁명을 생략하고 바로 무력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가야한다는 데 있다.
멘셰비키는 부르주아혁명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부르주아의 협조 없이는
혁명을 완수할 수 없다고 했으나 레닌의 볼셰비키는 믿을 수 있는 동맹자는
오로지 농민과 노동자뿐이라며 멘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 단계 론을 비판했다.
멘셰비키는 의회를 통해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혁명을 추구하며
폭력과 무력에 의한 체제 전복을 반대했으나
볼셰비키는 오로지 무력에 의해서만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멘셰비키는 유럽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들과
유사한 노선이라고 보면 될 거 같다.

1905년 굶주림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지친 노동자들이 러시아 정교 가퐁 신부가 주도한
당시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에게 직소하기 위하여 왕궁까지 행진하는
비무장 평화 시위대에 황실 근위대가 무차별 발포를 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낸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자 레닌의 볼셰비키는 즉각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여
비폭력 의회주의를 고수한 멘셰비키와 갈등을 빚자
레닌의 볼셰비키와 마르토프가 이끄는 멘셰비키는
완전히 갈라서 분당하게 되고 레닌은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짜르 제정이 붕괴되고 케렌스키가 주도한 임시 정부가 들어서자
4월 독일의 도움으로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레닌은 곧바로 페테르그라드 소비에트
중앙위로 가서,

‘ 2월 혁명 후 수립된 임시정부는 인민의 정부가 아니고 독일과 치르고 있는
  지금의 전쟁은 인민을 위한 전쟁이 아니며 우리에게 자유주의 국가, 부르주아식 민주주의는
  불필요하고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 이외의 어떤 정부도 필요 없으며 인민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독재뿐이며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 외 부르주아적인 모든 것들을
  일체 거부하며 아울러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막중한 임무는
  기필코 프롤레타리아 국제 혁명을 시작해 한다는 것이다. ‘
  라는 그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하게 된다.

당시 이 주장은 획기적이고 너무 과격해 ‘지금은 마르크스 이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 단계인 부르주아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야 하는 단계‘ 라고 생각한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과 멘셰비키의 노선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 내에서도 그 실현 가능성이 논란이 되어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멘셰비키도 참여한 임시정부에서 이러한 레닌을 검거하려고 하자
레닌은 볼셰비키 동지들의 도움으로 핀란드로 피신하게 되고
임시정부가 각종 개혁을 시도했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져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 되고 어느 누구도 정부를 신뢰하지 않게 되자
10월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소비에트 중앙위를 소집해 즉각적인 무장 봉기를 주장했고
이에 반대한 멘셰비키가 퇴장해 버리자 당시 의장이던 트로츠키의 협조를 얻어
적위 대를 결성하게 되고 이 적위 대 1,000명이 임시 정부를 접수함으로서
10월 혁명을 무혈혁명으로 성공하게 된다.

이후 트로츠키의 지휘 하에 적군은 멘셰비키를 비롯하여 왕당파 등 볼셰비키를 반대하는
모든 반혁명 잡동사니들이 집합하여 결성된 백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제일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을 비롯한 유럽제국들은
여전히 볼셰비키 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명실공이 세계 최초로 소비에트 방식의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게 되고
당연히 레닌이 그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모두 잘 알고 있겠지만 러시아 혁명 당시의 소비에트(평의회, 또는 협의체)에 대해
부연 설명하자면,
노동자, 농민, 군인들이 각기 최초 단위의 소비에트를 결성한 후
그 대표들이 모여 그보다 상부 단위의 소비에트를 결성하기를 반복하면
각 집단의 최상층 소비에트를 구성하게 된다.
노동자 소비에트를 예로 들자면 노동조합처럼 우선 각 공장에서 기초 소비에트가 결성되고  
그 대표들이 모여 지역 별, 산업 별 소비에트가 결성되어
다시 그 대표들이 노동자 소비에트를 구성하는 식이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이후 먼저 노동자 소비에트가 결성되고
뒤따라 농민 소비에트가 결성되었고
1914년에 일어난 제 일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하여
전쟁의 고통과 배급 물자의 부실로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으로 이루어 진  
하급 사병들 사이에 군인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참고로 당시 유럽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
귀족 출신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장교로 임관하였고
반대로 평민 출신은 무조건 사병으로 징병되어 아무리 오래 군 복무를 하더라도
또는 전투에서 어떠한 공을 세우더라도 절대 장교로 진급할 수가 없었다.
대신 전투에서는 항상 장교가 진두지휘하여 위험에 앞장섰고
귀족들이나 그 자제들이 전투에 참가하여 싸우다 전사하는 걸 영광으로 여겼으며
하다못해 부상이라도 입지 않고 멀쩡히 돌아오는 걸 대단한 수치로 여겼다.

어쨌든 2월 혁명이후 사병들의 소비에트가 강화되어
장교들의 발포명령이나 진격명령을 거역하는 병사들의 집단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나중에 10월 혁명의 종지부는 결국 이 사병 소비에트의 몫이 되었다.

이 3개 집단의 대표들이 모여 최고 의결기관인 소비에트 중앙위원회가 결성되고
초기에는 회의를 주재하는 의장만 있었지만  
중앙위원회에 참석한 대표 수가 몇 천 명에 이르러 중구난방 식 발언에
분위기도 산만해져 제대로 의결이 이루어지지 않는 등 효율적인 운영이 어렵 자
이 중 소수의 상임위원을 선출하여 이들에게 중앙위 전권을 위임하게 되는데
이는 레닌이 마르토프의 멘셰비키와의 논쟁에서 승리할 때 주 쟁점 요인 중 하나로
레닌이 주장한 ‘소수 엘리트 당원의 당 지도’ 이론과 일맥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중앙위에서 선출된 소수의 상임 위원이 결국 국가를 통치하는 집단 지도체제를 이루지만
레닌 이후 상임위에서 한 사람에게 결정권을 이양하게 되어,
겉보기에는 소비에트라는 거대한 집단지배 체제처럼 보이지만
실지로는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짜르에 버금가는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당, 일인 독재 체제가 갖추어졌다.
이북은 공산당 정권 수립이후 소비에트 시스템을 갖추고는 있으나
이는 인민의 의사가 전혀 반영이 안 되는 형식적인 거에 불과하고
절대 권력과 지배세력이 세습되고 있어 봉건적 전제 군주제와 같은 체제가 되어버렸지만
공산당 일당 독재국가인 중국, 베트남, 쿠바는 아직도 이런 소비에트 방식의
의결 및, 국가 통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은 후 레닌은 볼셰비키 당명을 공산당으로 개명하고
공산당원의 자격으로서 노동자, 농민,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제한하였다.
인텔리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레닌과 트로츠키가
바로 이 양심적인 지식인에 속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러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던 민주사회 노동당의 주류였으며
볼셰비키와 당규 논쟁에서 진 이후 갈라섰지만 10월 혁명 직전까지 혁명 동지였던
멘셰비키를 샅샅이 색출하여 모조리 처형해버렸다.

정권을 잡은 레닌은 러시아로서는 우크라이나, 발트 3국, 핀란드를 독일에 떼 주는 등
거의 항복에 가까울 정도로 굴욕적인 조건임에도 독일과의 전쟁을 서둘러 종식시켜
국내를 안정시키고 1919년에는 4월 테제에 의거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원을 위해
제일차 코민테른을 결성하여 약소국, 식민지 국가들의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이듬해 제이차 코민테른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의 선언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각 당의 중앙위는 코민테른 대회와 집행 위원회의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1927년 레닌이 57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직전 트로츠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끔찍이 혐오하던 스탈린을 당에서 축출하라고 명하였으나
레닌의 사망으로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반 레닌주의자로 몰아 숙청한 후
스스로를 레닌의 후계자로 지칭하고  
레닌의 사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유리관에 안치시키고 붉은 광장 옆에 묘소를 만들어
인민들에게 참배케 할 정도로 레닌의 우상화에 몰두했다.

이야기가 빗나가지만 이 코민테른이 우리나라의 공산당 역사와도 연관이 있다.
코민테른에 의거 우리나라 초창기 공산주의자였던 김 립 등이
1921년과 22년 두 차례 레닌을 만나 무장 독립운동 자금으로 40만 루블을 요청하자
레닌은,
‘ 조선은 봉건 사회에서 바로 식민지가 되어 인민들이 공산주의를 이해할 수 없으니
  우선 독립 투쟁으로 민족 자립을 쟁취한 후 자본주의 발전과정 단계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는 게 좋을 거 같다.‘ 는 충고와 함께  

흔쾌히 요청 금액의 다섯 배에 달하는 200만 루블을 제공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기가 애매하지만 현재 달러 가치로 2천만 불,
즉 200억 원도 넘는 상당한 금액이었지 않나 는 예측이 가능할 거 같다.
30만 루블씩 두 다른 루트를 통해 반입되었다는 기록만 있으니까
200만 루블이 다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속된 말로 배달 사고가 났을 수도 있고.

그러나 중국, 러시아 각 지역에 산재해 있던  조선인 공산당 지역당간 분배 문제로
갈등이 야기되고 이를 알게 된 김 구는
그 돈을 임시 정부로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 립을 배신자로 낙인찍어
암살자를 보내 김 립을 사살해버렸다고 한다.

4월 테제와 코민테른에서 레닌이 주창한 프롤레타리아 무력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세계 혁명, 중앙위에 무조건 복종 등이 바로 볼셰비즘, 즉 레닌주의의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서가 아니라 선거를 통해 자기주장을 하고
선거에서 의석을 얻어 의회에 진출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체제의 일부분으로서
점진적이고 변증법적인 역사관에 의해 개혁을 주도하고자 하는, 즉 마르크시즘에 충실하고
멘셰비즘 적인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
일본의 사회당이나 공산당, 쿠바를 제외한  남미의 좌파 정당들과 볼셰비즘은 구별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우리나라에는 좌파를 NL (National Liberalization) 계와 PD (People's Democratic)계로
크게 두 파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NL계는  
미군의 무조건 철수가 최우선 테제다.
미군이 주둔하는 한 우리나라가 자주 국가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
미군이 철수하면 이미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화 되었으므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각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니까 볼셰비키에 가깝다.

대신 PD계는 구지 프롤레타리아 무력 혁명이 아니더라도
체제 안에서 인민들의 지지를 확보하여 선거를 통해 정권에 참여하거나
정권을 창출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수도 있다는 생각이니까  
멘셰비키의 기본 노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나 공동의 목표를 위해 투쟁할 때는 서로 협조하였지만 그 대상이 사라진 후
두 계열이 격심한 노선 논쟁을 겪은 끝에 결국 민노 당과 지금의 정의 당으로 갈라진 건
러시아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전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전적으로 바로 이 볼셰비키의 확산을 저지하는 데 있었다.
자유 민주주의의 부정, 주권 재민의 부정, 프롤레타리아 무력 혁명,
볼셰비키 일당 독재, 독점 권력을 위임 받은 당 중앙위의 결정에 절대 복종 등,
볼셰비즘, 즉 레닌주의는 미국의 건국이념, 국가이상, 주권재민,
3권 분립에 입각한 국가 운영 체계에 송두리 채 반하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미국이란 국체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말들이다.

또한 4월 테제와 제3 코민테른에서 ‘세계를 볼셰비키 화 하기위한 혁명을 시작하자’고
선언한 후 실제로 약소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 운동과 볼셰비키 화에 지원을 아까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볼셰비키보다 더 강력한 위협이었던 독일의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은 소비에트 연방과 불가피하게 같은 연합국으로서 협력할 수밖에 없었지만
전후 거대한 중국대륙이 볼셰비키 화 하자 현실화 되어가는 볼셰비키의 세계화가
당장 코앞에 닥친 가장 큰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의 모든 초점은 1950년대 초반 한때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매카시즘으로 인해 야기된 과오도 있었지만 볼셰비키 확산 저지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2017.02.11. 송 종 호.




토요 살롱 202회 " 미국의 중동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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