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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17-02-25 21:01:42, Hit : 2231, Vote : 509
  토요 살롱 203회 "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

‘테러와의 전쟁’ 이란 말이 심심찮게 매스컴에 등장하고 있다.
9.11이후에는 국제 사회의 주요 사안으로서 그 강도가 더해지고
거론되는 빈도수가 부쩍 늘고 있다.

테러에 비교적 자유로운 우리 입장에서는 사실 남의 나라 일로서
대체로 강 건너 불 보듯이 하고 있고 별 관심을 못 끌고 있지만 당하고 있는 당사자들은
아무런 대비도 없는 상태에서 넋 놓고 있다가 그것도 번화한 도심지에서 폭발 등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대량으로 희생되고 있으니
그 참담함과 분노와 복수심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거 같다.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테러가 여러 명목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여기서는 미국이 당하고 있는 테러에 관해서만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선 미국이 내 걸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 은 미국 민과 미국 재산에 대한 테러로 국한된다.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테러에 대해 입으로는 강도 높게 규탄을 하고
당사자를 위로도 하고 희생자에게 애도도 표하지만 실제로 행동에 앞장서지는 않았다.
동맹국으로서 모양새 갖추느라고 뒤에서 동참하는 척은 해왔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 일으킨 테러범을 지구 끝까지 쫓아서 사살하거나 잡아와 미국 법정에 올리는
소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어디까지나 남의 나라 일이다.

그리고 가해자가 한정되어 있다.
바로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다.
즉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을 테러로 공격했거나 하고자 하는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바로 그 상대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아무 연관도 없는 미국을 괜히 툭툭 건드리고 있는 걸까?
자기보다 약한 자라면 몰라도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을?
계란으로 바위를 부딪쳐야 하는 절박함이 있고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지 않고야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랍인들은 자기들 조상이 아브라함이고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인 이스마일부터
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태인과 같은 조상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랍어와 히브리어는 나에게는 두 언어 모두 전혀 문외한이라서 그런지
들어서는 분간이 안 된다. 글자도 비슷하다.
유태인은 술을 마시고 아랍인들은 철저한 금주를 하는 이외에
돼지고기를 부정한 음식으로 터부시 하는 등 식생활도 거의 똑 같다.
순수 유태인과 아랍인은 검은 머리에 짙은 눈썹 등 생김새도 구분이 안 된다.


바이블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못 낳아 첩을 들여 첩에서 아들을 먼저 낳아
이스마일이라고 불렀고 그 후에 본처에서 아들을 낳아 이삭이라고 불렀는데
정처에서 낳은 둘째 아들 이삭을 적자로 삼고 첩과 첫째 아들 이스마일은 재산을 떼어주어
멀리 보냈다고 되어 있다.
바이블에서 아브라함 다음의 역사는 이삭으로 이어지고
이스마일과 그 후손에 관해서는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란에는 이스마일이 첫째 아들로서 적자이고 요셉은 둘째 아들로 서자인데
유태인들이 여기서부터 바이블을 완전히 왜곡하고 조작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400년 노예로 살았다는 거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모세의 기적 같은 게 일어날 리가 없는 거고
솔로몬의 대성전, 그 이후의 이스라엘, 유태 두 왕국도
모두 유태인들이 날조한 픽션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간교한 유태인을 가까이 하지 말고 친구로 삼지 말라고 했지
박해하고 특별히 구박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반기를 들거나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또는 자기들이 특별히 박해를 받지 않으면
타 종교에 비교적 관대한 게 이슬람이다.
때문에 아랍 전 지역이 이슬람으로 통일 된 이후에도 주거지역이 제한되기는 했지만
아랍권역에서 유태인 집성촌을 이루고 화려한 세공품을 만들어 왕가에 납품하고
수공업을 발전시키며 비교적 평화를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이런 예도 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을 만 천하에 선포하고 그 소식이 전 세계로 전파되었는데
예멘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도 그 소식을 듣고 예멘 국왕에게 선물 보따리를 잔뜩 들고 가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자칭, 3천 년 전 솔로몬 왕 시절 성전 건립을 축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시바 여왕이 돌아갈 때 따라 온 유태인들의 후예라고 한다.

예멘 국왕으로서는 보석 가공, 금 세공품, 수공업 등으로 왕국 재정과 경제에 도움이 되던
유태인들을 모두 보내는 게 아쉬웠으나
예멘 국왕은 이 간청을 들어주어 신생 이스라엘에 그 사실을 알리고
대신 자기들이 보내 줄 수 없으니 알아서 데려가라고 했다.
그러나 신생국 이스라엘은 이들을 데리고 올 방법이 없었다.
그들을 태우고 올 수송선도 없었고 더더욱 비행기라고는 전투기든 수송기든
단 한 대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궁여지책 끝에 캐나다의 유태인을 통해 2차 대전 후 공군 수송기 한대를 불하받아
자기가 직접 조종을 하며 개인영업을 하고 있던 미국인을 소개받아
우선 1개월 charter 계약을 하고 예멘의 유태인 수송을 맡겼다.

사전에 서로의 교신을 통해 확인 결과 수송할 유태인이 약 3,000명이라고 하여
한번에 100명 정도를 태울 수 있으니 하루에 2번 왕복하여 200명씩 나르면
보름에 수송을 마칠 수 있고 중간의 정비 등을 감안하더라도 한 달이면 충분할 줄 알고
수송기 도착 시간을 알려주고 예멘의 제2 도시이자 항구 도시인 아덴의 비행장에
모두 모이라고 했다.

이윽고 사막 한가운데 수송기가 도착하자
조종사와 통역과 안내 등 승무원으로 함께 간 이스라엘 남녀 군인들도 놀랐고
옹기종기 모여 기다리고 있던 유태인들도 놀랐다.
조종사 일행은 3,000년 전 복장을 그대로 하고 꾀죄죄하기 이루 말 할 수 없는데다  
100명이 아니라 200명도 태울 수 있을 정도로 생각보다 훨씬 왜소한 유태인들이
손에는 모두 필사본인 바이블과 모세 5경을 꼭 쥐고 있는 모습에 놀랐고
예멘 유태인들은 생전 처음 본 비행기에 놀랐다고 한다.

놀랄 정도가 아니라,
출 애급 기 19장 4절,
‘ 내가 애급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를 암송하며
기쁨에 겨운 눈물을 줄줄 흘리다 못해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3천년을 기다린 끝에 여호와가 드디어 자기들을 구하러 독수리를 보냈다고 생각했으니
그 감격이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거다.

이 유태인들은 3천년을 하루같이 매년 새해가 되면 다음 새해에는 예루살렘에서
기도할 수 있기를 빌었고 떠날 때 가져 온 바이블과 모세 5경을
일일이 손으로 써 대대손손 전해 왔다고 한다.
후일담이지만 정작 수송기에 태우려고 하자 유태인들이 꼼짝도 하지 않아 당황하여
연유를 알아보자 마침 그 날이 sabbath, 즉 안식일이라 절대 움직일 수 없다고 하여
할 수 없이 하루를 묵었고 다음날 예멘 유태인을 가득 태우고는
그 냄새 때문에 조종사와 일행들은 모두 다 토해 냈고
특히 조종사는 냄새에 질려 현기증 때문에 겨우 조종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인근에서 유태인들이 계속 꾸역꾸역 몰려오는 바람에
아무리 실어 날라도 그 수가 줄지를 않아 결국 계약을 계속 연장하여 6개월이나 소요 되었고
조종사는 이 비행기 한 대로 아예 이스라엘에 눌러 앉아 오늘날 이스라엘 민간 항공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흩어져 살던 유태인들이 가재도구를 나귀에, 마차에,
혹은 식솔들이 나눠 등짐을 지고 천리 길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도중에
비록 통행세도 내고 강도들에 털리기도 했지만 목숨들은 다들 부지한 채
무슬림 국가들을 몇 나라나 통과하면서도 커다란 애로사항 없이 이스라엘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때만 하더라도 무슬림들이 유태인들에 대해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이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거 같다.

1700년대 말 폴란드가 러시아에 합병된 이후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주거가 제한되어 제한된 주거지 외로 나다니지도 못하게 되고 경작도 금지 되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태인을 특정하여 구속하는 법안이 600개가 넘었다고 하니
사실 농노보다 못한 신세였다.

그러고 100년 쯤 지난 1800년 대 말 당시 황제이던 알렉산더 2세가 농노를 해방하며
유태인들에게도 얼마간의 속박을 풀자 유태인들은 즉각 러시아 공동체로 동화되어 갔고
특유의 근성과 타고난 재능으로 부를 축적해 나가 주변 러시아 인들과의 빈부 차가 커져갔다.

표면적인 이유는 유태인이 알렉산더 2세를 암살했다는 루머였다고 하지만
이 빈부차가 도화선이 되어 경찰까지 합세하여 유태인을 무차별 폭행하고 체포하고
약탈하고 탄압하게 되는데 이게 러시아에서 포그롬의 시발이 되고
1905년 피의 일요일 이후에는 혁명의 배후로 지목되어 반혁명 탄압 수단으로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백군과의 내전 시는 반혁명군에 의해 대규모로 유태인이 학살됐다.

뿐만 아니다.
레닌이 독일과 화평 조약을 맺으면서 폴란드를 독일에 떼 주자
새 주인이 된 독일의 유태인에 대한 대우는 날이 갈수록 그 가혹하기가 더해갔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러시아의 폴란드 게토에서 태동된 게 시오니즘이다.
이후 시오니즘도 노선에 따라 여러 계파로 갈라졌지만
공동의 목적은 여호와에게서 부여 받은 구약의 가나안 땅에
독립국을 건국하는 것이었고 그 본부는 당연히 폴란드의 게토 내에 있었다.
그리고 이 본부의 지휘 하에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시작 된다.
폴란드 계 미국인인 레온 유리스가 쓴 non-fiction 에 가까운
장편 'Mila 18' 은 이 당시가 배경이다.

초기 정착 자금의 대부분은 영국의 금융재벌 로스차일드에서 대 주었다고 한다.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에서의 정착과정이 물론 순탄할 수는 없었다.

우선 정착지를 수배하고 땅을 구입해야 하는데 토착민 지주들이 경작이 가능한 땅을
팔려고 내 놓을 리가 없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황무지 땅을 그것도 바가지 왕창 쓰고 사서 지하수를 파고
물을 끌어 댐을 만들어 관개를 하는 등 밤낮 없이 일을 해 드디어 작물을 수확하게 되어
하나의 정착촌이 완성되면 이번에는 두 군데로 넓히고 그러면 폴란드 본부의 지휘 하에
순서대로 대기하고 있던 이민자들이 들어오고
그러다 일차 대전이 종식되자 영국이 독립을 약속한 바도 있고 해서 대규모로 이주하게 된다.
이에 놀란 영국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안을 봉쇄하고
유럽에서의 유태인 유입을 막아버렸다.
이 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폴 뉴먼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한 레온 유리스의 ‘Exodus' 이다.

어쨌든 이렇게 유입된 유태인과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 큰 충돌은 없었던 거 같다.
토지를 강제로 점유하거나 사취한 게 아니라 정당하게 돈 주고 구입하였고
밤낮으로 일만하니 주변과 트러블을 일으킬 일도 없었다.
물 때문에 유태인 정착촌이 가끔 공격 받기도 했으나
대체로 유태인들이 양보 하는 선에서 타협하면서 결정적인 파국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
레온 유리스의 소설‘Haji'에 의하면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 공공연하게 왕래는 하지 않았지만
정착촌 대표들이 오히려 지역의 유력자들과 몰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협조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하기 전까지 이슬람과 유태인들이
서로 친해질 수는 없는 사이이기는 하더라도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거나 치명상을 입은 적이 없었다.
양자 간에 십자군 전쟁처럼 무슨 대규모 분쟁도 없었다.

영국은 일차 대전이 종식되어 오스만 터키 제국이 해체되고
중동 지역 대부분을 위임 통치하게 되자 일차 대전 참전을 대가로 약속한 바를 지키기 위하여
아랍 권역을 독립시키되 16개국으로 쪼개어 분리 독립시켰다.
그것도 영국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그 지역의 부족장이거나 왕족을 찾아 왕으로 앉히고
왕국 형태로 독립을 시켰다.
이유는 아랍이 하나의 나라로 강력해지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갈가리 나누어져 있어야
서로 간의 분쟁이 끊이질 않을 것이라 영국이 막후에서 조정 역할을 할 수가 있고
막대한 이해가 얽힌 석유와 수에즈 운하를 계속 영국의 영향 하에 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영국의 구상은 힘깨나 쓰고 개인적인 영욕이 앞서던 부족장들이나
구 왕족들의 후예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영국의 의도대로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 국민들의 의사와 아무 관계없이 영국이 정한 왕이 통치를 하니
맨 날 쿠데타에 소요 사태에 정정이 펀한 날이 없을 수밖에 없고
집권자들은 이런 국내의 불만과 불안 요인을
어디다 밖으로 표출할 곳을 찾아야만 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듯이 때마침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하자
아랍 민족주의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그 타깃을 이스라엘로 삼고
국민들의 관심을 그 쪽으로 돌렸다.

사실 아랍민족주의는 이슬람 교리와 배치된다.
이슬람의 ‘사해동포’ ‘이슬람 하의 모든 무슬림은 형제와 자매’ 라는
국경과 종족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는 신 앞에 동등하다는 평등사상이 이슬람의 핵심이다.
이 슬로건으로 관습과 인종의 차이를 극복하고 거대한 무슬림 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분열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흥 집권 세력의 아랍 민족주의와 전통의 이슬람주의의의 내적 대립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아랍민족주의자들을 개인의 영욕을 채우기 위해 세속화 된 배교자로
취급하고 이를 도와주는 세력을 이슬람을 파괴하려는 적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스라엘 독립 선포 후 당사자인 지역 주민들인 팔레스타인인들이 들고 일어난 게 아니라
주변 국가인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에서 그 다음 날 바로 쳐들어왔다.
6차까지 전쟁이 일어나고 사이사이 국지전, 폭탄테러에 보복 폭격 등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는데 전장 터가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보니까  
자연히 팔레스타인인 민간인들의 피해가 제일 클 수밖에 없었고.
집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은 난민도 팔레스타인인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6차까지 모든 전쟁을 자기들이 일방적으로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모든 원인을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으로 돌리고
가장 큰 피해자인 팔레스타인인들을 선동하고 증오심을 증폭시켜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인들은 복수를 위한 여러 무슬림 무장 테러 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이란의 사막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 된 20세기 초,
이란은 영국의 절대적인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석유 채굴도 영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러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당시 국왕이었던 팔레비1세는
몰래 독일과 내통하고 독일을 도와주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은 러시아와 합작 침공하여 나라를 둘로 쪼개버렸고
팔레비1세는 국외로 망명하고 영국 등의 좌우 압박에
왕위를 아들인 팔레비2세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왕위를 물려받은 팔레비 2세가 개방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책을 펴자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이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영 시위도 잇달았다.
당시 영국은 이란 석유 수입의 90%를 수탈해 갔다고 한다.
이를 시정하고자 이란에서 50대 50을 요구했으나 영국은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황실과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 재분배하는 등 혁신적인 정치로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당시 총리는 석유 채굴을 국유화하고 영국을 내쫒아 버렸다.

영국은 이란이 석유 수출을 못하게 항로를 봉쇄하는 등 보복 조치를 취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이란의 석유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던 영국은 이대로 두면 이란이 반드시 볼셰비키 화 하니까
미연에 방지해야한다고 미국을 꼬드겼고 당시만 하더라도 중동 정세에 어두워
중동을 오랫동안 통치해 중동에 정통한 영국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데다
볼셰비키란 말에 기겁을 한 미국은 이에 넘어가 CIA의 공작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총리를 체포해버렸다.
그리고 절대 권력을 친미, 친영 적인 팔레비에게 안겨주었고
영국은 재협상을 통해 석유 기득권을 되찾았다.
이때부터 이란 국민들이 미국을 혐오하게 된다.

그러나 1953년 미국이 개입한 쿠데타로 왕정복구 한 후 25년만인 1978년,
팔레비가 전통의 이슬람 관습을 무시하고 퇴폐적인 서구 문명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데다
일가의 부패가 극심해지자 결국 혁명으로 쫓겨 가게 된다.

모두 알다시피 이슬람은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어지는데 절대다수가 수니파이고
시아파는 소수이다.
시아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 국가는 아란과 이라크 두 나라밖에 없다.
이웃인 이란에서 혁명이 성공하여 정교일체의 회교 공화국을 수립하자
시아파가 다수인데도 수니파인 후세인이 정권을 잡고 있던 이라크는 그 불길이 번져올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란의 혁명 지도자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을 수출하겠다.’ 고 까지 공언했다.
볼셰비키 식이다.

그래서 같은 위협을 느낀 사우디, 쿠웨이트, 요르단 등 수니파 아랍 국가들의 지원을 업고
이라크가 일방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이란으로 쳐들어간 게 이란 이라크 전쟁이다.
물론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친 미의 팔레비가 쫓겨나고 미 대사관이 인질로 잡히는 등
망신을 당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뒤따랐다.
1980년부터 8년간 지속된 이 전쟁 동안 후세인에게 막대한 무기를 대 줬다.
이래서 미국에 대한 이란국민들의 미움은 배가 된다.

개전 초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엄청난 지원과 후원을 받은 후세인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화력으로 초전박살,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이란의 끈질긴 저항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일진일퇴 공방으로 변해 8년이나 끈 끝에
결국 서로 피해만 잔뜩 입고 전쟁 전으로 원 위치 하는 조건의 협정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이란으로서는 국토방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거의 전 세계가 이라크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조차 이라크 편을 들었다.
이란에게 무기라도 팔아준 나라는 이북과 중국 정도였다.
결국 이란을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아버렸다.

미국으로서는 영국에 사기 당하다시피 이란 내정에 간섭했지만 실속은 영국이 다 차리고
얻은 건 아무 것도 없는 채 돈만 잔뜩 쓰고 미움까지 덤터기로 얹어 받고
이란에 핵무기 개발의 빌미까지 제공했으니
그야말로 속된말로 뭐 주고 뺨 맞은 꼴이 되었다.

그러니 대신 분풀이 해 주겠다며 큰 소리 빵빵 치고 전쟁을 일으켜 있는 대로 뜯어 간
후세인이 얼마나 얄미웠을까.
게다가 곧 바로 쿠웨이트가 원래는 이라크 영토라며 되찾겠다고 쳐들어갔으니
미움 털이 안 박힐 수가 없었을 거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9.11이후 별 죄도 없고 힘도 다 떨어진 후세인까지 싸잡아
몰래 화학무기를 생산하고 있다고 뒤집어 씌워 잡아다 사형시켜버린 원인도
멀리는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아무 소득 없이 허무하게 전쟁이 끝나자 후세인은 막대한 전비 부담을 안게 되었다.
8년 전쟁 동안 쓴 전비가 무려 5,000억 불을 넘었고
사우디에서 빌린 돈만 1,500억 불에 달하는 엄청난 빚도 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다수인 시아파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어 뭔가 일을 저질러야 했는데
그래서 쿠웨이트가 원래 이라크 영토였으므로 돌려받아야 되겠다며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선전포고도 없이 어느 날 무작정 쳐들어가버렸다.
석유의 보고인 쿠웨이트만 병합하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일어난 게 걸프전이다.

처음에는 침공 며칠 만에 쿠웨이트 전 지역을 점령하여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한 주로 편입하는 등 이라크의 기세가 등등했으나
미국이 이라크 본토의 무차별 폭격과 지상군을 포함한 대규모 병력과 최신화기를 투입하여
이라크를 초토화 하자 후세인은  무조건 항복 하게 되고
사우디는 미국이 오랫동안 요구해 온 사우디 영토 내 미군기지 건설을 허락하게 된다.
원유 수송항로의 안전성 확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이 사우디에 오랫동안 기지건설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지만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전투가 사우디 내륙으로까지 번질 번하자
자체 방위를 위해서도 미국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미군의 사우디 주둔은 1990년 이후 미국에 대한 주요 테러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아프가니스탄이 1973년 쿠데타로 왕정을 몰아내고 공화정이 되었으나
정정의 불안이 계속되고 결국 1978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
좌파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곧 바로 급진파와 온건파로 내부가 분열되고 이로 인한 연 이은 쿠데타와
급진적인 토지개혁으로 농촌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는 동안
러시아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심지어 수백 명의 러시아 인이 살해되는 상황에 이르자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내 러시아 인을 보호하고 친러 정권을 안정시킨다는 미명하에
1979년 군사력을 동원하여 아프간을 침공했다.

당연히 러시아를 아프가니스탄에서 몰아내고 이슬람 국가로의 회귀를 목적으로
수많은 무장 저항 단체가 결성되었고 이들을 돕기 위해 해외 무슬림들도 속속 동참했다.
소위 Mujahedin 이다.
이 때 알 카에다의 빈 라덴도 무자헤딘의 일원으로 아프간에 날아가서
러시아를 아프가니스탄에서 몰아내기 위한 무장 투쟁에 동참했고
나중에 탈레반을 조직하여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탈레반 정권을 수립한
Mullah Mohammed Omar 와 교우하게 된다.

10년 투쟁 끝에 1989년 러시아가 철저한 패전을 하고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 내의 여러 반러 투쟁 단체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내전에 돌입했지만
해외에서 온 무자헤딘들은 갑자기 갈 데도 할 일도 없어졌다.
이 때 걸프전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미군의 사우디 진주로 이어지자
빈 라덴은 미군의 사우디 진주를 사우디가 미국의 종속국으로 전락하는 걸로 간주하고
더구나 기독교국의 이슬람 지배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며
미군이 사우디에서 철수할 때까지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한 대미 투쟁을 선언하고
갈 곳 없는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들을 흡수해 알 카에다에 편입시켰다.

90년대 들어 소말리아, 수단, 케냐,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지역 미 대사관 습격 사건은
모두 알 카에다가 벌인 일이라고 스스로 선언했다.

2001년 9.11의 배후가 빈 라덴의 알 카에다 로 밝혀지자,

I shall bring to the justice court, the terrorists as well as those who harbor
  the terrorists." 라고 부시가 맹세한 거처럼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이슬람 근본주의자 Mullah Mohammed Omar 의
탈레반 정권을 박살내 쫓아낸 후 비교적 온건하고 친미적인 새 정권을 수립하고
비록 부시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 후임자인 오바마에 의해 빈 라덴도 사살되었다.

다음 주 토요일인 3월 4일은 가까이 지내는 사회 후배의 혼사가 있어
토요 살롱을 올리지 못하니 미리 동기들과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2017.02.25. 송 종 호.




토요 살롱 204회 " 미국의 이슬람에 대한 인식 "
토요 살롱 202회 " 미국의 중동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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