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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17-05-20 17:57:06, Hit : 2500, Vote : 610
  토요 살롱 209회 " 미국의 독립과 건국 이념 "

동문 가족 마라톤 대회에서 하프 마라톤을 기어들어오다시피 겨우 완주하고
반죽음 상태가 된 지난 4월30일에서 한 달쯤 전인 3월 19일에 개최된
동아 국제 마라톤에 참가하여 3시간 56분에 주파한 영문이는
그 대회가 마침 100회 출전 대회였다고 한다.
2년 전 쯤 70회를 넘었다고 하여 매회 10회씩 완주하면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는 100회에 도달하겠다고 나름 계산하고
100회 출전 때는 대대적인 세리모니를 해 줘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말도 없이 소문도 없이 목표를 일 년 일찍 달성해버렸다.
한 달에 한번이 아니라 2주에 한번 꼴로 참가했고 참가 대회마다 완주했다고 한다.

“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여전히 ‘under 4’ 네?
  상주 중학교 동창들이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한다더니 뭐 플래카드라도 들고 왔어?”

‘under 4'란 풀코스를 4시간 이내에 완주하는 걸 아마추어 마라토너들 사이에
‘최소한 이 정도는 뛰어야’
하며 정한 가이드라인 이라고 하고 이 말을 자기들 사이에 은어처럼 사용한다고 한다.

“100회 완주 이후로 요즘은 살살 뛰어.
4시간 10분에서 20분 정도야.‘

살살 뛴다는 게 그 정도라니, 3년 전인 2014년 가을에 춘천 마라톤에 출전하여
완주한 나의 기록인 5시간 15분과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다.

“두 주에 한 번?”

“응 그 정도. 5월 27일 채인이와 같이 뛰기로 했는데 너도 올 거야?
종원이가 자전거로 응원오기로 했는데. “

“ 노 탱큐 야. 3년 전 춘천 마라톤에서 풀코스 완주가 나의 생애 처음 도전이자
  은퇴대회였어. 뛰고 난 후 말도 못하게 후회를 했지만 하나 득 되는 게 있었다면
  한계를 절실히 깨달았다는 거고 생긴 대로 살아야 된다는 거지.
  금년에는 하프 뛰는데도 죽는 줄 알았어. “

5월 4일 귀국한 채인이는 일주일 후인 5월 11일 동신이, 수갑이, 우성이 등과
일박이일 코스로 영암 월출산 등반을 다녀 온 후
5월 14일 마라톤 풀코스를 4시간 32분에 완주했다.
5월 27일 대회를 대비하여 연습 삼아 뛴 기록이 그 정도니 뭐 말이 안 나온다.

우리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를 4시간 반 이내에 주파하는 노인 철인이
두 명이나 가까이에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그것도 일 년에 한두 번 완주가 아니라 채인이는 봄가을 한국에 올 때마다 3,4회,
일 년에 일곱, 여덟 번, 영문이는 일년에 20번 이상을 완주하고 있다.
채인이는 이 번에도 5월 27일 뛰고 6월 6일 또 뛴다고 한다.

더구나 그 중의 한명은 벌써 완주 100회를 돌파했다.
3년 전 춘천 마라톤 뛸 때 35km 지점을 지나며 마라톤 250회를 완주해 신문에도 나고
유명인사가 된 70대 중반의 노익장 마라토너가 주위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뛰고 있는 모습과 지나친 적이 있었는데 영문이도 이 조시라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250회를 넘어 300회도 뛸 수도 있어 우리나라에 새로운 기록을 세울 뿐 아니라
이 방면의 세계 기록이 어떤지 모르지만 기네스북에도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식민지 각주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인 대륙 회의에서 모국인 영국과의 전쟁을 결의하고
식민지 연합군을 조직하기로 하는 한편,
조지 워싱턴을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1775년만 하더라도 명색이 전쟁이지
영국군 주둔 부대에 기습이나 하는 게릴라 전 정도였고
거창하게 연합군이란 명칭이 무색하게 말이 군대지 군인들이라고는 정규훈련은커녕
총도 제대로 잡을 줄 모르는 오합지졸들이 대부분이었다.
정규 훈련에 실전 경험도 많은 영국군과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식민지 주둔 영국군은 본국에 의지하기보다 현지에서 지원군을 모집해
식민지 내에서도 독립파와 모국 충성파가 서로 충돌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 식민지 주민들의 3분의1 정도가 모국인 영국 왕실에 충성하는 왕당파였으며
뉴욕 같은 곳에서는 영국군에의 지원병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게 식민지 주민들 대부분이 영국에서 갓 이민 온 1세대, 2세대 여서
영국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가 있었고
영국에 대한 전쟁은 모국에 대한 모반이라는 생각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니 무슨 전쟁이 제대로 수행될 수도 없었고
영국 본토에서도 식민지 불평분자들의 일시적인 반항 정도로
사태를 심각하게 보지도 않았을 거로 짐작 된다.
또한 식민지 각 주 대표들의 모임인 대륙회의에서도 불평등한 조세를 폐지하고
자기들이 뽑은 대표를 영국의회에 보내게 해 주면 독립 전쟁을 중단하겠다는 탄원서를
영국 왕에게 보낼 정도로 독립 운운은 실지로 독립하겠다는 게 아니라
영국에 대한 협박용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압도적인 군사력과 조직력, 전술과 경험을 겸비한 영국이 협상에 응할 리가 없었다.

이런 어정쩡하고 느슨한 분위기를 일거에 180도 전환시키고
식민지 주민들의 의견을 독립으로 통일시키고 전쟁에 열기와 열정을 불어 넣어준 게
토마스 페인의 ‘Common Sense' 였다.

단순히 뒤집기만 한다고 혁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혁명에는 방향이 있다.
‘ancien regime' 즉 왕정과 계급, 신분 사회가 급속하게 한 순간에 붕괴 되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 인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체제와 정부로의 전환이
바로 그 방향이다.
역 방향, 반동이나 동일 가치 제도 내에서의 변환은 각각 그 경우에 따라
정변, 쿠데타, 항쟁, 반란 등으로 일컫지 혁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상식인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하는 건 상식이며
비상식인 왕정에 대항하여 상식인 혁명을 통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건 상식 이라고 주장한 페인의 ‘Commence Sense' 는
1976년 1월에 발간되자 순식간에 50만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당시 미 대륙 식민지 인구가 노예를 포함하여 약 300만 명 이었다고 하니까
식민지 성인 남자들은 거의 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로서 전쟁의 명분과 목표가 한 목소리로 통일될 수 있었다.

만민 평등을 주창한 미국 독립선언서에 노예제에 대한 언급이 누락된 걸 문제 삼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가치를 폄하하는 견해도 일부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현재의 잣대를 기준으로 삼아
괜한 시비 거리를 만들고자하는 호사가들의 경박한 억지에 불과하다.
당시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존 아담스,  토마스 제퍼슨 등은 물론
초대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도 노예 폐지를 옹호하여
독립 선언서 초안에 이를 포함시켰으나 대륙회의 대표들의 대다수가
버지니아의 대 농장을 경영하던 농장주들이어서 이들의 반대로 삭제되었다고 한다.

영국과의 전쟁 중이라 우선 적전 분열을 막고 내부 통합을 하기 위한 일종의 미봉책이었다.

토착민인 인디언들의 수가 유럽에서 옮겨온 전염병으로 급격히 줄자
노예들의 노동력이 절실할 수밖에 없었던 농장주들의 강력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미해결의 장을 남겨 둔 결함에도 불구하고
1776년 미국의 독립을 선포한 독립 선언서의 내용과 그에 기초하여 건국한 미국의 독립은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한 획을 긋고 한 chapter의 마감을 알리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인류 역사와 더불어 함께한 왕정 내지 독재, 신분, 계급을 철폐하고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 천부 인권, 인민의 동의로서만 가능한 권력의 형성,저항 권 등
민주주의의 핵심사상을 이론이 아닌 실천 강령으로 선언하고 통치 이념으로 삼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토마스 페인의 ‘Common Sense' 와 미국 독립 선언서의 이론적 배경은
1688년 권리 장전을 서명케 하여 영국 명예혁명을 이끈
토마스 홉스로부터 시작하여 존 로크와 장 자크 루소로 이어진 고전 사회계약론이다.

사회 계약론의 명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며 따라서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가 최우선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는 자신의 욕구 충족과 생명, 재산의 보호를 위해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불가피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명제는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거다.
합리적인 인간은 그러한 투쟁을 막을 방법을 찾아 정부를 구성하고 계약을 맺음으로서
자연 상태를 탈피하여 타인의 생명, 건강, 자유, 재산을 침해하지 않는
공동선을 추구하게 된다.

또 하나의 명제는 이러한 계약의 해지는 자유이며 계약에 의한 권력은 절대적일 수 없어
언제든지 저항할 수 있고 해지하고 새로운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거다.

루소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은 모두 자유롭게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속하는 한 어디에나 사슬에 매여 있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나
현실적으로 불가능 해 이러한 인간의 천부의 자유를 보장받고자 시회 계약을 하게 되고
이와 같은 공동선을 보호하고자하는 의지들이 모여 일반의지를 이루게 되는데
개인은 이를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이 일반의지가 법으로 나타난 형태가 주권이며
이 주권은 본래부터 인민에게 속해 있는 것이며 양도할 수 없다 라고 못을 박았다.

사회 계약론이 미국 독립 선언서와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을 위한 이론을 제공했다고 하면
이에 의해 구성된 정부의 실행방법에 대한 이론적 배경이 된 건 공리주의였다.

경험주의자인 데이비드 흄에게서 영향을 받아 벤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진 공리주의는
‘개인은 행복을 추구하려 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 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공리주의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임금 착취와 노동자의 피폐한 삶에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운동과 동 시대에 등장했다.
사회주의와는 달리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행동이 선이며 정의이므로
이를 기초로 하여 정부가 입법과 행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했다.
바로 이 공리주의가 초기 미국 정부의 정책 기조였다.

토마스 페인이 미국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함으로서 혁명 완수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혁명 이후 혁명의 목표인 민주주의를 정착 시킨 인물은
단연코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이었다.

1787년 헌법을 제정하고 1789년 13개주 대표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워싱턴은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거의 기울어 갈 무렵
전쟁이 끝나면 자기는 버지니아의 농장으로 돌아갈 거라고 선언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일화가 하나 있다.
이런 소문을 들은 당시 영국왕 조지 3세는,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워싱턴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게 진퇴를 분명히 하는 사람을 보기 힘든데
이제 겨우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던 때에
아직도 세계사 적으로 봉건 전제군주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때에
전군을 장악한 미 연합군 총 사령관에, 전쟁 영웅에,
엄청난 지지 세력을 등에 업은 최고 권력자가
무슨 정치 집단이나 권력 추구 세력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라이벌이나 경쟁 대상자가 전무한 신생국에서
자기 역할이 끝났다며 바이바이 하고 미련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
농장이나 돌보겠다고 하니 설마 하고 절대 믿지 못 했을 거다.

그러나 워싱턴은 1783년 전쟁이 끝나자 자기 농장으로 돌아 가버렸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된 워싱턴은
외교는 합중국의 안보나 이해관계에 해가 되지 않는 한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지 않는
불간섭주의를 천명하고 내치로는 세금을 거둬 그 범위 내에서 나라를 운영한다는 기조 하에
조세 정책을 중시하여 우리나라 국세청 격인 I.R.S (Internal Revenue Service)를 창설하고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교육을 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다며 전국 방방곡곡에 학교를 세우고
모든 행정 구역이 스쿨버스를 운영하여 산간벽지, 아무리 외진 곳에 거주하더라도
미국 민이라면 스쿨버스가 가서 태우고 와 학교에 등교케 했다.

그 외 조지 워싱턴의 업적과 일화에 대해서는 토요 살롱 95회 ‘가치관의 혼란’ 편에
주요 부분들이 소개되어 있어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관심 있는 독자들은
토요 살롱 95회를 참고하기 바란다.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워싱턴은 새 수도를 건설하기로 하고
지관을 대동하고 부지를 물색하러 다녔다.
후보지의 조건은 우선 주요 정치 지도자들의 근거지였던 버지니아에서 멀지 않아야 되고
강이 흐르고 언덕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듬해인 1790년 수도로 지정한 곳이 지금의 워싱턴DC 다.
포토맥 강이 도심을 관통하고 있고 동쪽 끝의 경계는 애너코스티어 강이 흐르고 있다.
언덕이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거기에 국회의사당을 짓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에서 건축가를 불러 도시 설계를 맡기고 도시 경계가 된 애너코스티어 강을
로마 북쪽에 흐르는 티베르 강의 이름을 그대로 옮겨 티베르 강이라고 명명하고
수도 이름도 로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미국 국회의사당을 Capitol 이라고 부른다.
Capitol의 유래는 로마에 일곱 개의 언덕이 있는데 언덕마다 로마의 신을 모신 신전이 있고
로마의 최고신인 주피터 신전이 있는 언덕 이름이 Capitol 이라서 이다.

그만큼 워싱턴은 로마 공화정을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동경했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는 평민의 의결 모임인 민회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민회를 견제하기 위해 귀족들의 대표로 구성된 기구가 원로원이다.
현재 미국의 양원제와 닮은 점이 많다.

민회에서 매년 최고 통치자인 집정관 2명을 직접 선거로 뽑았다.
임기는 일 년으로 6개월씩 교대로 집무했고 연임 불가였다.
한 사람만 뽑았을 경우 유고가 발생할 경우도 대비했다.
이런 점은 현재 미국의 정부통령 제와 비슷하다.

연임이 불가하지만 예외 규정을 두어 국가 비상 상태, 즉 외적의 침입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임기를 연장 할 수 있게 했는데
이 경우도 6개월 넘지 못하게 규정했다.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집정관이었던 시저는 이런 규정을 악용하여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일으키며 자신이 종신 황제로 등극하기까지 임기를 연장했다.

임기 중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 루스벨트 대통령이
바로 이 공화정 로마의 국가비상사태의 경우를 적용하여 4선까지 연임하게 된 거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후 1951년 헌법을 수정하여 대통령이 3선 이상 출마를 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 버렸다.

워싱턴이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민주주의 토대를 구축하고
민주주의 정부의 초대, 최초의 수장으로서 모범을 보이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하고 역사적인 업적은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두 번 연임 후
권좌에서 깨끗이 물러난 일이 아닌가 싶다.
연임에 대해 아무런 제한도 없음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은
자기들의 통치자가 생전에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난다는 걸 상상도 못할 때 였다.
그러나 3선으로 선출은 모두가 당연한 거로 여기고 있었고
차제에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조차 있었지만 이를 미연에 봉쇄하기 위하여
미리 언론에 고별사를 발표해버렸다.

“ 조국에 대한 고마움과 수 세대에 걸친 선조들과 이 땅에 뜨거운 애정을 느끼면서
  나는 은퇴 후에 누리고자 스스로 다짐했던 생활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해 봅니다. “

은퇴하여 다음해 프랑스와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아져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이 다시 미합중국 총 사령관에 임명되자,

‘내 몸에 남아 있는 모든 피를 조국에 바치겠다.’ 며 총 사령관 직을 수락했다.

이런 지도자가 존재한 미국이 부러울 뿐이다.

워싱턴의 유언장 중 백미는
자기 농장에 속해 있던 노예들을 자기 아내가 죽은 후 해방하라는 내용이 아닌가 싶다.
더 대단한 일은 미망인은 자기 죽은 후를 기다리지 않고
워싱턴의 유지를 받들어 자기가 손수 모든 노예를 남편의 장례를 마친 후
즉각 해방시켜 버렸다.
2017.5.20. 송 종 호.




토요 살롱 210회 " 미국 건국 정신의 뿌리 "
토요 살롱 208회 " American Revolu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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