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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17-05-27 21:38:09, Hit : 2513, Vote : 627
  토요 살롱 210회 " 미국 건국 정신의 뿌리 "

종주국인 영국의 착취에 대한 단순한 항의에서 비롯해 독립 전쟁을 선포하게 되고
급기야 혁명으로까지 승화하게 된 데에 토마스 페인의 70쪽짜리 소책자 한 권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이의가 없는 거 같다.
그 때까지 그 누구도 열렬히 독립의 당연성과 필요성을 떠들고 다니며
적극적으로 식민지 주민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요즘처럼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매스컴도 없을 때였다.

오히려 전쟁을 벌이긴 했지만 전쟁에 이기리라고는 누구도 기대는커녕 상상도 하지 않았고
전쟁 도중 본국과 적당히 타협하여 실익을 이끌어내자는 게
대륙회의 대표들의 대체적인 속셈이었다.
또한 대륙회의에 각주 대표들이 참석은 하고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고 지도력을 겸비한 뚜렷한 지도자도 없어
식민지 국민의 관심을 한 곳으로 통일시킬 수도 없었다.
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조지 워싱턴이 군대를 모으고 훈련시키고
직접 전선을 이끄는 바람에 그나마 조금 알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조지 워싱턴이 군인들을 상대로 왜 영국과 전쟁을 해야 하고 왜 독립을 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역설은 하였지만 이는 연합군 총 사령관으로서 전쟁에서 승리를 하기 위한
당연한 사기 진작용 격려사 정도였다.

‘Common Sense'를 출간할 때인 1776년 1월에 저자인 토마스 페인은
아직 만 39세가 안 된 나이었고 영국에서 이민 온 지 겨우 2년이 넘었을 때였다.

영국에서의 주 직업도 식자공이었고 뭐 들어낼 만한 전력이라는 게 전무하여
미국 민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전혀 어필이 될 수 없는 생소한 인물이었다.

또한 13세 이후 정규 교육도 받지 못 했고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식자공 등 날품팔이 노동일을 위주로 여러 직종을 전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위 일반 대중들이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저명인사하고는 완전히 반대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하층 계급에 속해 있었다.

더구나 당시 대륙에는 경험론, 계약론, 계몽주의자 등 역사상 즐비한 천재 사상가들이
나중에 근대 국가개념의 골격이 되는 주요 이론을 다투어 출간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아무리 그 내용이 충격적이라 하더라도 이런 사람이 쓴 책이
대중적인 문학 작품도 아니고 심금을 울리는 넌 픽션 러브 스토리도 아닌
어찌 보면 선동적이고 정치 구호 일색의 딱딱하고 일방적인 내용인데
어떻게 당시 식민지 성인 남자들의 거의 전부가 필독할 만큼 그렇게 폭발적으로 팔려 나가고
집단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이민 1,2세대의 주류는 역시 영국의 청교도들이었다.
영국 왕실이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국교로 세운 성공회를 거부하고
장로교 헌법을 새로 제정하고 캘빈의 종교 개혁을 추종한 청교도들이
본국에서의 탄압을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난 건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의 수송선은 돛을 달고 바람에 의해 항해하는 범선이었다.
영국에서 출항해 미국의 매사추세츠 연안에 도착하는데 보통 3개월여가 걸렸다고 한다.
물론 도중에 아무 사고가 없을 경우였다.
별 사고 없이 무사히 항해를 하더라도 승객의 20% 정도는 3개월여 항해 도중에
선상에서의 사고,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떠났다.
그만큼 당시 청교도들은 절박했고 자유에 대한 열망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에 반기를 들고 어떤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뜻을 굽히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것도 이교도로부터도 아니고 같은 종교 내의 교리상의 해석과 의식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동학처럼 부패한 관리의 가렴주구 식 착취를 당해서도 아니다.
같은 여호와를 믿고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동일한 신앙이라면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저항하고 목숨을 걸고 이역만리 낮선 곳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날 게 아니라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절대 타협불가의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단지 사회적 직분이 다를 뿐이다.’
라는 만인 평등사상이다.

말이 좀 빗나가지만 우리 역사학계의 혁명아 국민 대 지 두환 교수에 의하면
루터보다 50년 후쯤 독일과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동양의 조선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재상으로 활약한 율곡 이이도 이와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루터의 개혁 사상을 계승한 캘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직업은
신이 각 개인에게 부여한 신성한 것이라는 직업 소명설로
모든 사회적 직분의 차별과 직업의 귀천을 없애버렸다.

16세기, 아직도 조선은 양반, 상놈, 사농공상, 천민, 종순으로
사회적 직분의 귀천과 이에 다른 차별 대우가 엄연했고
그런 신분의 차별이 체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봉건 사회의 한 가운데 깊숙이 묻혀 있을 때였다.

이러한 캘빈의 주장은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캘빈의 사상에 고무된 영국 청교도 신학자들은 이러한 캘빈의 주장을 더욱 진화시켜
직업은 신이 부여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재능과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며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개인에게 귀속시켰다.

자신의 직업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인생을 신이 예정하고 신이 간섭하고 신이 결정하고 신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종래의 종교관에 일대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개인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
이런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 사상들이
이후 수많은 경험주의 철학자들, 사회 계약론 자들 ,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지루하게 논증하기 이전에
이미 영국 청교도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지향하는 목표가 되었다.

따라서 토마스 홉스가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기 이전에 청교도들에게 절대 통치권인 왕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는다는 종래의 왕권신수설은
구시대의 폐기되어야 할 낡은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왕정과 왕정 옹호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의 명예혁명이 일어난 1688년 이전 수 십 년 동안
청교도들이 집중적인 박해를 받았다는 점이 이를 입증해 준다.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점으로 봐서 청교도들이 비록 영국 왕정을 인정하고
왕정과 공존함으로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귀족계급과 신흥 부유층 등
기득권층은 아니더라도 무지 몽매하거나 가난한 하층은 아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본국 보다 나을 거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곳에 가기 위해
몇 달씩 배 멀미에 시달리며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지는 않았을 거고
더구나 먹고 살기 힘들 정도라면 만만치 않았을 배 삯도 구하기 힘들었을 거다.
그러니까 초기 이민자 중에는 빈곤층이 먹고 살기 위해 이민을 간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될 거 같다.

당장 입에 풀 칠 할 거리도 없어 이민을 떠나기 시작한 건 미국의 독립과 정부 수립 후
수 십 년이 지난 180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아일랜드에 기근이 닥쳐 당시 인구 800여만 명 중 100만 명이 굶어 죽고 200만 명이
미국,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마침 신생 독립국의 노동력 부족과 맞물려
하루에 만 명씩의 이민 객이 미국에 도착하기도 했다고 한다.
참고로 현재 아일랜드의 인구는 700만 명이 채 안 된다고 하니 200년 전 보다 인구가
100만 명 이상 적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초기 미국 이민 1,2 세대의 주류를 이룬 청교도들은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절대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만인 평등사상과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추구한  
요즘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깨어 있는 중산층 인텔리들이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영국의 청교도들 외에 유럽에 거주하던 유태인들도 신대륙으로의 이주가 러시를 이루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 유럽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천년이상
유럽의 크리스천 국가들로부터 격리되고 박해를 받았던 유태인들이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향한 건 당연지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해의 당사자가 크리스천 국가들의 절대 군주 왕정들이었으니까
구지 사회계약론을 끄집어 내지 않더라도 유태인들의 유럽의 왕정에 대한 선입관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모세가 400년 동안 비록 종살이지만 안정적으로 터전을 잡고 있던 이집트에서
동족을 몽땅 끌고 홍해를 넘은 것도 자유를 찾아서였고
바빌론 유수이후 수천 년 떠돌아다닌 유태인들이 그토록 갈망한 건
불평등과 차별과 불공정으로부터의 자유였으므로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신대륙으로 향 할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향한 또 한 그룹이 있었으니
역사상 가장 오랜 비밀 결사 집단인 프리메이슨 들이었다.

프리메이슨의 유래를 신화화하여
구약의 솔로몬의 성전 신축에 얽힌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후세 프리메이슨들이 자기 조직을 신비화하기 위하여
혹은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꾸면 낸 픽션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프리메이슨이란 말 그대로 석공들의 모임이었다.

중세 유럽의 부는 왕과 왕으로부터 영지를 하사 받은 귀족, 그리고 교회에 집중되어 있었다.
공업이 미미할 때라 농업이 재화 생산과 부가가치의 절대 포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잦은 전쟁으로 왕이나 귀족들은 요새마다 견고한 방어용 성곽이 필요했고
통치권자로서의 권위의 상징으로 다투어 웅장한 궁을 지어야 했다.
교회는 한 술 더 떴다.
위압감과 신비감을 더하기 위해 곳곳에 대규모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를 건축했다.
서양의 건축물은 거의 전부가 돌로 구축되어 있다.
건축 전체가 거의 석공들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왕과 영주, 교회가 축적한 재산이 석공들에게 빨려들어 갔고
석공들은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다.
우리의 요즘 식 상상으로는 돌 쌓는 일개 노가다가 무슨 돈을 그렇게 벌 수 있겠냐 싶겠지만
당시의 석공들은 단순한 노가다가 아니었다.
설계가 완성되면 그 다음 공정은 석공들이 전체를 도급 맡았다.
요즘 치면 종합건설 회사라고 보면 된다.

인부들과 도제, 숙련공들을 데리고 돌만 쌓고 인건비만 받는 게 아니다.
발주자의 요구에 따라 돌의 종류 색깔, 가격에 따른 돌의 질을 선택해야 되고
그 과정에서 발주자, 설계자와 수시로 상담해야 하고
그 돌의 산지를 찾아야 되고 돌을 캐 알맞게 자르고 운송해야 한다.
때로는 석재 운반용 길도 새로 내야 한다.
뿐만 아니다.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자재는 외국에서 수입을 해야 해 trading 도 필요했다.

일감은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당시 거의 모든 건축물은 돌로 지어졌고
교회, 왕궁은 물론 극장 등 공공건물 들, 영주들의 대 저택,
신흥부자들의 저택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처럼 석공들의 사업이 번성하게 되자
자신들의 이익을 독점하고 친목도 도모하고 상호 정보도 교환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협회를 결성하여 신디케이트를 형성하게 된 게 길드다.
당연히 가장 돈이 많은 석공 길드가 최강의 길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축적된 자본을 유용하기 위하여 금융업에도 진출하게 되어
나중에 유태 자본과 함께 국제 금융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된다.

당시 농업 이외의 두 가지 부의 축적 수단 중 하나가
왕과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진 해상무역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순수 하층 평민들로 구성된 석공들이 시행한
건축과 그에 관련된 부속 사업이었다.
따라서 이 두 부분이 초기 자본주의 자본형성의 실물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석공 길드가 부와 막강한 조직을 갖추게 되자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신이 속한 계급의 몫을 주장하기 위해 신분제도의 불이익을 타파하려다보니
자연스럽게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을 고취하게 된다.

사업가들의 모임이라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종교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스스로 개척하고 이룬 성과여서 창조주는 인정하지만
창조주가 인간의 운명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理 神 論( deism )적 관점으로
구지 이야기 한다면 청교도와 가깝다.

조직이 커지자 나름 내부의 도덕적 지침을 정하여 인도주의적 박애주의를 표방하게 되는데
이도 루터의 종교 개혁이래 캘빈을 거쳐 청교도들의 생활 규범으로 요구 된
엄격한 검약과 금욕 생활과도 일치된다.

이 프리메이슨들이 가톨릭의 탄압을 받아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와 같이 미국 건국의 선조들인 초기 이민자들을 구성한 청교도들과 유태인,
그리고 프리메이슨들은 신대륙으로 향하기 전부터 이미 그 유래가 각각 다르지만
거의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

즉 평등, 인간의 존성성과 자유, 이를 보장하고 지켜줄 수 있는 정부,
왕권신수설에 의한 절대 왕정이 아니라 인민에 의해 권력을 부여 받되
언제든 그 소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때는 폐지 또는 교체 가능한 정부,
미국 독립 선언서에 표현된 대체적인 이런 생각들을 논리적으로 이론화하여
동시에 표출하고 집단적인 동의를 구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지만
각자 마음속에는 구체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토마스 페인이 가장 평범한 하층 평민 출신이었지만
그로 인한 어떠한 선입견이나 불이익을 받지 않은 이유는
대다수 초기 이민자들이 그런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고자
그런 게 없는 세상을 찾아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토마스 페인이 이민자들의 마음속에 잠재 된 열망을 꼭 집어
진정을 담아 격정적으로 쓴 ‘Common Sence' 가
단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국론을 통일 시키고 단순한 독립 전쟁을 혁명으로 승화시켜
미국 건국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미국 혁명은 나중에 일어나는 여타 혁명과는 달리
의식화 된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민 전체가 미리 의식화 되어 일어난 혁명이고
이러한 전체 인민의 뜻을 담아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건국되었다.
2017.05.27. 송 종 호.




토요 살롱 211회 " 프리메이슨이 미국 건국에 미친 영향 "
토요 살롱 209회 " 미국의 독립과 건국 이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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