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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17-06-10 22:01:33, Hit : 3767, Vote : 646
  토요 살롱 212회 "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 및 러시아 혁명과의 비교 "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7년간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세계 역사상 최초로 인민에 의해 이루어 낸 미국 혁명은
그 이후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1905년 피의 일요일을 시발로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과는
ancien regime 의 붕괴라는 결과는 동일할지 몰라도
그 동기와 전개 과정은 물론 혁명이후 인민의 힘으로 세운 정부의 스타일과
그 정부의 변천과정에서 크게 비유가 된다.

미국 혁명 당시 미국의 일인당 소득 수준이 현대의 기준으로 환산하면
본국인 영국의 세배에 달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는 본국인 영국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풍족했다고 한다.
1620년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 주 연안인 플리머스에 도착한 후 150년이 지나는 동안
드넓고 비옥한 토지를 개간하고 이민자들의 성실과 개척 정신에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영농법을 도입하여 농축산물이 그야말로 넘쳐났고
금상첨화로 태평양과 대서양 앞 바다는 세계적 황금어장이었다.
보스턴 앞 바다는 물 반 고등어 반이었고 뉴잉글랜드 연안에는 바다가재가 넘치고
뉴욕 연안에는 싱싱한 굴이 무한정이었다고 한다.
울창한 원시림에서 질 좋은 목재도 무진장 베어낼 수 있었다.
엄청난 양의 야생 동물 모피도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얼마나 물자가 풍족했는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당시 미국의 한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교도소가 제공하는 식단을 거부하고
단식투쟁을 했는데 그 이유가 교도소에서 매일 제공하는 바다가재가 너무 지겨우니까
바다가재를 일주일에 3번 이하로 줄이고 대신 빵을 더 달라는 게 투쟁 이유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터무니없이 과장된 이야기 같지만 사실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미국의 주민들이 최소한 먹고 살기 힘들어
영국에 대항 한 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과의 전쟁의 주 동기에 대해서는 1775년 영국 함대와 정규군이 미국 영토 내에 배치되고
영국과의 대립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버지니아 주 의회가 강제 해산되자
이에 격분한 버지니아 주 의회 의원이자
이듬해 미국 독립 선언 후 초대 버지니아 주지사가 되었던
패트릭 헨리가 버지니아 의사당에서 대 영국 전쟁을 독려한 연설에서 여실히 들어난다.
간략하면,

‘우리가 영국 내각과 의회에 청원도 하고 항의도 하고 호소도 하고 왕의 중재도 간청했으나
모두 무시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를 굴복시키고 예속화시키기 위하여
군대와 함대까지 파견하였습니다.
군대와 함대를 배치한 건 적을 쳐부수기 위해서입니다.
즉 영국은 우리를 쳐부수어야 될 적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재를 원하고 평화를 주창하지만 우리의 목숨이 그렇게 소중하고
평화가 그렇게 달콤한 것입니까.
이것이 과연 자유를 위한 원대하고 험난한 투쟁에 나선 사람들이 할 짓입니까.
다른 사람은 어떤 길을 택할지 모르지만 나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우리가 어릴 때부터 많이 듣던 문구가 여기서 등장한다.
즉 미국 혁명은 민중들이 굶주려서가 아니라
본국 정부에 보다 많은 자치권과 공정한 대우의 요구로부터 시발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온 선조들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서였다.

반면에 미국의 독립선언 한지 13년이 지난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황실이 미국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 때문에 국가재정이 바닥이 났는데도
여전한 황실의 극단적인 사치로 국가부채가 급증하고
이를 매우기 위해 당시 특권층이었던 소수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려하자
이에 반발한 특권층이 국민회의, 즉 삼부회의를 소집한 게 직접적인 발단의 원인이 되었지만
국민의 90%를 차지하며 조세와 근로의 부담을 전적으로 지고 있던 평민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나날이 증가되어 평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핍박해지자
황실과 집권층에 불만이 고조된 게 근본 원인이었다.

당시 프랑스 황실은 모자라는 재정을 채우기 위해 부르주아 귀족들로부터 돈을 꾸고
그 대신 일정한 영지의 수조권을 주었는데 이들은 여기에 마진을 붙여
일종의 징세 대리인에게 다시 넘겼고
이 세리들은 여기에 다시 자기들 이익을 취하려다 보니까
별별 악랄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농민들을 쥐어 짤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렴주구에 더하여 때마침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들고
우박이 쏟아지고 벼락이 치는 이상기후로 흉작이 몇 년째 이어지자
그 기근으로 인한 참상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수조 채우기에 혈안이 된 세리들은 밀레의 ‘이삭줍기’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정경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남겨두었던 이삭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았고 얼마나 기아에 허덕였는지 사람도 잡아먹었다고 한다.
괴롭히는 세리를 잡아다 바비큐 해 먹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을 정도다.

즉 프랑스 혁명은 후일 역사가들이 당시 범람하던 계몽주의 사상을 끌어 들여
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건 혁명 이후 공화정을 수립하고 헌법을 제정하며
민주주의 국가로의 체제를 갖추는 과정에서 이를 주도한 부르주아 인텔리들이  
혁명을 이념화하면서 부터의 이야기이고
혁명의 발단은 오로지 황실과 귀족들의 극단적인 사치와 현실을 무시한 실정으로
국민의 90%를 차지하면서도 조세와 근로의 100%를 부담하던 평민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정도로 먹고살기가 힘들어지자 터져 나온
순순한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경우 그 발단의 경위가 더욱 명확하다.
1905년의 피의 일요일은 굶주림과 과도한 노동에 지친 민중들이
황제의 곳간에 있는 식량을 풀어 굶주림을 면하게 해 달라는 간청을
황제에게 직소하기 위하여 황궁이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에 일터가 있던 노동자들이
더러는 가족을 동반하여 황궁으로 걸어서 행진한 데서 비롯되었다.
황제가 잘 몰라서 그렇지 황제의 백성들이 이렇게 어려운 지경에 있는지 알기만 하면
반드시 황실의 곳간을 풀어줄 거라고 확신하고 있던 순박하고 충성스런 인민들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군대가 평화적으로 행진하는 황제의 인민들에게 발포하자,
‘아니, 황제의 군대가 황제의 백성들에게 총을 쏴?’

이러한 실망과 분노가 의식을 바꾸게 되고 그 것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미국의 혁명이 구별되는 또 한 가지 특징은 혁명의 주체, 즉 대다수의 민중이 이미
혁명의 불가피성, 그리고 그 방향과 목적을 이해하고 의식화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시작부터 ‘빵을 달라’ 가 아니라 ‘자유를 달라’ 였다.  
당시 미국 식민지 인구가 노예를 포함하여 300만 명이었는데
토마스 페인의 ‘Common Sense' 가 50만부나 팔렸다는 사실은
거의 모든 성인 남자들이 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 이야기는 또 거의 모든 남자들이 최소한 글은 읽을 줄 알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자들에게 교육의 기회나 바깥일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을 때임을 감안하여 여자를 제외하면
문맹 율이 제로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당시 미국의 국민이 비록 영국의 식민지 국민이었지만
지식을 접 할 수 있고 그걸 바탕으로 한 토론 같은 걸 할 수 있는 건
극소수 특권층이나 가능했던 아직도 미몽의 봉건주의에 속해 있던 여타 나라에 비교하여
얼마나 개회되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프랑스 혁명의 주체였던 평민이나 러시아 혁명의 주체였던 노동자 농민의 절대다수는
신분 제도 상 또는 빈곤으로 인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게다가 상당수가 문맹이라
무슨 사상에 동조하고 그 사상에 감명 받아 행동에  옮기고 할 상황이 절대 못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마당에 그런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고 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회 계약론이니 계몽주의 사상이니 또는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아나키즘이니 어쩌고 하는
뭔 소린인지 이해도 안 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렵고 고상한 이야기는
부르주아 엘리트 인텔리들만의 전유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혁명의 세 번째 특징은 뒤이어 일어나는 혁명들이 계금 투쟁이었던데 반해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프랑스나 러시아처럼 천부의 지배계급이 천부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일방적인 착취와
불평등에 대한 투쟁으로 비롯된 혁명이 아니었다.
식민지내의 국민들 사이에 신분과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본국인 영국 왕실로부터 수여받은 귀족 칭호는 있었지만
명예에 불과했지 무슨 특권이 있지는 않았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있었지만 차별은 없었고 대물림을 강요당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혁명 후 공화정을 수립하고 정착시켜 가는 과정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된다.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1781년 종결되자 1783년 파리에서 강화 조약을 맺은 후
1787년 5월 각주 대표 55인이 참석한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조지 워싱턴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그해 9월 독립 선언서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헌법을 확정 짓는다.

그리고 델라웨어 주를 시작으로 하여 1990년 로드아일랜드를 마지막으로
13개 주의 인준을 받는 동안 1789년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등
대외적이든 대내적이든 더 이상의 유혈사태나 충돌이나 저항 없이
순조롭게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의 힘에 의해 구성된 공화국 정부를 출범시키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비록 몇 번 헌법을 수정하기는 했지만
그 골격이나 정부의 형태는 변함없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프랑스는 1789년 바스티유 습격으로 혁명의 불길이 점화 된 후
1799년 나폴레옹이 의회를 해산하고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군사독재를 시작하면서‘이제 혁명은 끝났다.’ 라고 선언할 때까지
10년 동안 왕당 파 등 여러 계파의 반목,
정권을 잡은 좌파인 파리 코뮌의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
파리 코뮌의 초기 지도자였던 장 폴 마라의 암살,
이후 로베스 피에르와 함께 3두 체제를 이루었던  
자크 르네 에베르 와 로베스 피에로의 절친 이었던 조르주 당통마저
쿠데타 음모와 반동으로 몰려 차례로 단두대 처형을 당하고
혼자 남은 로베스 피에르는 더욱 더 독재와 단두대 처형에 의존하다
결국은 반동 부르주아 세력들에 의해 자신도 단두대에 처형당하는 등
그야말로 피가 그치는 날이 없을 정도로 살벌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의 나날들이었다.

1789년 바스티유 습격 후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여 한 자유주의자인 라파이예트가 기초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에 미국 독립 선언서에 영향을 받아
천부 인권, 인간의 자유와 평등, 주권재민, 사상과 표현의 자유, 사유 재산의 자유 등을
주창하였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어디 멀리 산중에서 들려오는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 하는 염불소리 정도밖에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실지로 라파이예트는 대토지를 물려받은 부르주아 백작이었고
끝까지 입헌군주제를 옹호한 왕당파였다.

나폴레옹의 집권으로 혁명은 종결되고 비록 봉건주의가 폐지되었지만
혁명의 이상 중 주요한 요소였던 공화정과 주권재민은 날 샌 이야기가 되었고
나폴레옹 이후에도 그 손자뻘인 나폴레옹 3세가 황제로 등극하는 등
혁명 후 70 여 년 간 반동, 반혁명을 반복하다가
후일 레닌이 사회주의 체제를 예행연습 했다며 높이 평가한
선거에 의해 다수당이 되어 파리를 장악하게 된 세계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인
파리코뮌이 수립되고 비록 70일간이라는 단명으로 끝난 정권이지만
이 파리코뮌이 노동자 위주의 획기적인 정책을 시행하자
위기를 느낀 부르주아 정부군이 무력 침공하여 무자비한 살상을 펼쳐
‘파리의 다리 밑은 강물이 아니라 시체가 흐른다. ‘ 라고 할 만큼
수만 명이 학살 된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공화정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지만
그러고도 정정 불안으로 정권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뀌며
헌법을 수도 없이 개정해야했고
두 번의 대전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정체의 안정을 이루게 된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레닌이 1924년 사망하자 이를 이어받은 스탈린은
아직도 어수선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안정시키고 마르크스 식 공산화와 사유재산의 몰수,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의 레닌주의, 볼셰비키 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무자비한 일당 일인 독재 철권 정치를 펼치며 정적을 살해하고
무수한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킨다.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홀로도모르’ 란 말이 있다.
우크라이나 어로 'Death by Starvation' 이란 뜻이다.

1932년부터 1933년 사이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 사건을 일컫는 말인데
간략하자면 흑해 연안 비옥한 토지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 지주들이
사유 토지 몰수와 수확된 농산물의 전량 수거와 배급, 협동농작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자의 반입을 봉쇄하고 생산된 농산물은 전부 징발해버려
농민들을 대량으로 굶겨 죽인 사건이다.
당시 이로 인해 굶어죽은 사망자가 600만에서 800만에 이른다고 하고
어느 통계는 700만 명에서 1,000만 명에 이른다고도 한다.
이 중 3분의 일이 10세 미만의 어린이였다고 하는데
당시 우크라이나 인구가 3,000만 명 이었다니까
인구의 거의 삼분의 일을 굶겨 죽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미국과 달리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 이후 그 주체인 평민과 노동자 농민들이
비록 앙시앙 레짐을 붕괴시키고 신분의 구별과 이로 인한 차별은 철폐를 시켰지만  
그토록 처참하고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 이유는
혁명의 의미, 그 이상, 그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소수 엘리트들은 활발한 토론도 하고
이견에 따라 패가 갈리고 이합집산도 했지만 정작 그 주체들은 사전 인식이 전혀 없이
또한 새로 전개될 권력구조나 사회체제에 대해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엘리트 간의 투쟁에 어느 한 쪽을 편들다가 또는 승리하는 자가 이끄는 대로
무작정 따라가다 보니 또 다른 형태의 시련을 겪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혁명 주체의 이런 무지를 이용한 소수 엘리트들의 개인적인 야욕과 이를 성취하기 위한
선동과 잔혹성이 한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다음 주 토요일은 수년간 동기회 총무로 수고했고 신우 회 회장을 연임하였으며
나하고는 학교 다닐 때 같은 동아리 멤버였던 기선이 딸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
토요 살롱을 쉴 예정이니 미리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2017.06.10. 송 종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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