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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17-07-15 22:05:03, Hit : 2537, Vote : 659
  토요 살롱 215회 " 人 生 行 路 "

고교 졸업 후 혜인이, 한성이, 재효와 넷이서 여행도 다니고 캠핑도 하고
영화관, 술집을 전전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몰려다니다
1974년에는 당시 서울 공대를 다니고 있던 상명 대 교수 명식이,
서울 대 정치학과를 다니고 있던 채인이가 합세해 6명이 여대생 6명과 짝을 맞춰  
제주도를 11박으로 다녀오기도 했지만 제주도 여행을 정점으로
넷이서 같이 만나는 회수가 뜸해지기 시작하다가 대학을 졸업하고는 상당히 오랫동안
넷이서 함께한 시간이 없었다.

한성이와 혜인이는 학교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고
재효와 나는 사회에 나와 직장을 다니다보니 서로의 생활 리듬을 맞출 수도 없었지만
나의 경우 사회 초년병에다 1970년대 말, 당시 사회 분위기 상
일요일이고 공휴일이고 일이 있든 없든 365일 꼭두새벽에 출근해 밤늦은 시간 퇴근 후에도
회식이다 접대다 술자리를 몇 차례 돌다 통행금지 임박해서야
술에 떡이 돼 집으로 돌아가던 상사들 눈치 때문에라도
회사 일 외 개인적인 약속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직장 상사들은 너나할 거 없이 모두 가정이고 가족이고 개인생활이고
모두 팽개치고 일에만 미쳐있던 워크 홀릭 들이었던 거 같다.
그런 분위기에서 사회 생활을 한 우리 세대도 그런 습관이 자연히 몸에 밸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선배 세대나 우리 세대나 그러고도 이혼율이 상당히 낮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다 재효와 나는 해외를 뻔질나게 들락거리게 되었고
혜인이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자 4자 회담은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1989년에 큰 애가 태어나면서 우리 가족이 완전히 서울에 정착하게 되고
때맞춰 혜인이도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였지만
이번에는 재효가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 있어 여전히 넷이 모두 모일 수는 없었다.

혜인이가 귀국 직 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는 한성이, 동옥이, 종하 등과
우리 집을 자주 들락거렸었다.
혜인이가 귀국하자마자 영문으로 된 자기 박사학위 논문을 제본하자마자 그 첫 권을
우리 애들 엄마에게 증정하기도 했는데
이에 감격한 애들 엄마가 미국으로 이주할 때도 싸들고 가
지금도 미국 집에 그 논문을 고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서강 대 교수로 임용 되고서는 한성이와 셋이 만나는 경우도 드물게 되었다.

혜인이가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느라 학교와 연관되지 않은 일체의 사교 생활은 절연하고
행동반경도 집과 학교 연구실로 국한하여 거의 칩거생활을 하게 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다 2년 전인 지지난 해 재효가 회사 일로 잠시 귀국하였을 때
연희 동 한성이 네 길 건너편에 한성이 큰 여동생이 운영하는 한식집에서
비로소 네 명이 함께 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다.
넷이서 자리를 함께 한 건 거의 40년만이었다.
그리고 혜인이만 유일하게 부부동반이었다.

4년 전인 2003년  7월 하순 혜인이가 환갑 나이에
친지 소개로 만난 17세 연하의 미모의 서울 대 외교학과 출신 규수와
양가 가족과 가까운 친지만 초청하여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릴 때
초청받은 동기가 그날 결혼식 사회를 맡은 승헌이와 한성이, 갑호,
그리고 사회학과 동기인 김 일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혜인이 부부 결혼일이
내가 우리 부부의 결혼 30주년 기념여행으로 워싱턴에서 출발해 파리로 향하던
애들 엄마를 픽업하러 하루 먼저 파리로 떠나던 날이었다.
그래서 혜인이 부부의 결혼식에 가보지도 못했지만 결혼 일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혜인이 결혼식에 초청도 받지 못했고
산호세에 거주하는 재효도 연락도 못 받았고 당연히 참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혼식에 참석한 친구들이 혜인이의 요청에 의해 결혼 사실을 함구 하는 바람에
혜인이의 결혼 소식은 상당히 오랫동안 동기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었고
나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혜인이 부부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 그러니까 혜인이 결혼 후 일 년이 지난
혜인이 모친 상 때였다.

이를 기화로 혜인이 부인이 때 늦은 감이 있었지만 신혼집들이 겸하여
북아현 동 신혼집으로 나를 포함하여 친구들 몇 명을 초대하였고
그 후 가끔 재효가 귀국하거나 채인이가 귀국하는 등
가까운 친구들이 자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혜인이에게 연락하였고
별 일없으면 혜인이도 참석하였는데 언제나 부부가 함께 나왔다.
그렇다고 해봐야 일 년에 두어 번, 다해야 몇 번 되지도 않는다.

그러다 지난 2월 혜인이가 명퇴한 후 부쩍 자주 만나게 되었다.
용혁이 왈,
‘그 동안 못 보더니 밀린 거 한꺼번에 다 볼 모양이지? “

지난 3월 초 혜인이 부부, 충우, 한성이와 함께 혜인이 고향 여수를 다녀온 후로는
보통은 일요일 오후에 혜인이네 집에서 멀리 않은 시내 가까운 곳에서 혜인이 부부와 만나
시내 구경도 하고 산책도 하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헤어지곤 했다.
평일에도 서울에서 일을 보다 어정쩡하게 시간이 비면  북아현 동으로 가서
맥주 한잔을 같이 나누곤 했는데 날이 더워진 후로는 밖에서 만나기를 자제하고
별일 없으면 일요일 오후에 집으로 찾아가고 있다.

지난 늦은 봄 어느 날 혜인이 부인이 지나가는 말로 불쑥,
‘저 혹시 홍삼 드세요?' 하기에
‘제가 몸에 열이 많아 삼이나 녹용 같은 보양제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여태 그런 거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했더니,
‘아, 그러세요.’
그러고 며칠 후 현관문에 ‘택배 보관 중’ 이라는 쪽지가 붙어 있어 경비실에 가서
찾아 뜯어보니까 일회용 용기에 담긴 블랙베리 즙이 한 상자였다.
발송인이 혜인이 부인이었다.

‘아니 이런 걸 왜 보내셨어요? 혜인이 챙기기도 여간 아닐 텐데.’

‘혼자 계시고 술도 많이 드시는 거 같던데 제가 뭐 해 드릴 수도 없고
홍삼도 안 드신다고 해서 술 드신 날 해장 삼아 한 봉 씩 드시라고요.‘

‘고맙긴 하지만 쑥스럽네요. 이왕 보내 주신 거니까 염치 불구하고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난 일요일 오후 혜인이 부부와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헤어질 때가 되자,
혜인이 부인이,
‘저기 아직 초저녁이니까 잠깐 저희 집에 들러 차 한 잔 하시고 과일도 좀 드시고 가시지요.’
얼떨결에 돌아보니 혜인이도 그랬으면 하는 듯이 씩 웃고 있었다.
다음날 일정이 빡빡했지만 술을 마시는 게 아니니까 잠깐 들리는 거야
뭐 별 지장이 없을 거 같은데다 그냥 헤어지는 거고 괜히 좀 섭섭한 거 같아
흔쾌히 그러자고 하고 집에 들러 두 어 시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자리를 일어서는데,

“저기요, 이거 제가 경상도 식으로 얼큰하게 끓인 소고기 국인데요.
인터넷에서 한우 세일하기에 사서 무 콩나물 많이 넣고 끓였는데 간은 맞추시라고
심심하게 끓였습니다. 다섯 번 정도 드실 수 있게 낱개로 진공포장 했으니까
냉동고에 두셨다가 하나씩 꺼내 데워 드세요. 그런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 “

혜인이 부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쇼핑백을 건네주는데 그런 자기 부인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는
혜인이는 너무나 만족해하는 표정으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니, 이런 걸, 둘이서 드시지 사지육신 멀쩡한 데다 아직은 건강한 나한테까지 신경을
씁니까? “

“저희는 조 박사님이 좋아하셔서 가끔 해 먹거든요. 그리고 이번에도 먼저 먹었습니다.
끓이는 김에 좀 더 만든 겁니다.
혼자 계셔 일일이 해 드시기도 불편하실 텐데. “

독거노인 생활 15년 동안 이렇게 음식을 손수 만들어 준 경우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7년 전 발목이 부러져 두 달간 입원해 있다 퇴원하여 아직 목발에 의지하고 있을 때
경구 회 친구가 몇 가지 밑반찬을 들고 당시 거주하던 김포 고촌까지 달려와 주었었다.

그리고 5월 말 경이다.
경비실에서 택배 보관 중이라는 연락이 왔다.
여수에서 보낸 간장으로 담근 꽃게 장이었고 발신신이 혜인이 부인이었다.

“ 조 박사님하고 여수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꽃게 장 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거든요. 그래서 조 박사님이 송 선생님 한테도 좀 보내 주라고 해서
  저희 언니 네와 두 군데 보냈는데 큰 게 다섯 마리니까 몇 번 드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 계시면 자기 자신 챙기기도 바쁘시고 귀찮은 일도 많으실 텐데
  저희 조 박사님을 이해해 주시고 챙겨 주시고 조 박사님께 잘 해 주셔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아니, 무슨 말씀을, 우리야 50년 가까운 친구니까 당연한 건데도 오히려 피하려 하고
이제 겨우 몇 년 같이 살지도 못 한 부인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거 같아
되려 면목이 없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죄송하고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네요. “

처음 봤을 때 안하무인일 정도로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보여
혜인이가 감당하려면 꽤나 고생하겠구나 싶었는데 그런 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현실을 수긍하고 오히려 배려하는 마음에 어디 마음 한 구석이 아리게 아련해져 왔다.

“ 연락이 없으셔서 걱정했어예.
  혹시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닌가 하고예.
  이제 고만 가족들 계시는 미국으로 가셨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예.“

종정이 부인의 목소리에 안도하는 모습과 반가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실려 온다.
지난 1월 말 미국을 다녀 온 후 설에 연락하고 몇 달을 연락을 못 했었다.

더욱이 걱정했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거가 한 줄기 생기, 기쁨 같은 활기가 되어
마음속을 시원하게 뚫고 지나간다.

“ 연락 못 드려 죄송합니다.
  뭐 하던 일이 오늘 내일 하며 계속 미뤄져 결말이 나면 연락하려다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그 동안 별 일은 없으시지요?  종정이도 잘 있고요?

“ 애들 아빠가 요즘 상태가 좀 안 좋아서 지금 계속 긴장하고 있습니더.
  일이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힙니더.
  이번 주하고 다음 주는 병원 일정도 잡혀 있어 마음이 불안하고 그렇네예.“

“ 힘드시겠네요. 그러나 13년을 그러고 지냈는데 뭐 별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 종정이가 이런 상태로나마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지만
  부인의 지극 정성을 봐서라도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부인이 우선 쓰러지지 않고 지탱을 해야 하니까
  항상 너무 무리 마시고  몸 보중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두 주간 경황이 없으실 거고 제가 괜히 아는 척 해봐야 방해밖에 안 될 테니까
  제가 두 주 후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

“ 그래 주실렵니꺼. 죄송합니더.
  그러고예, 애들 아빠 좀 안정되면 콩국수 드시러 오이소.
  제가 콩국수 맛있게 해 드릴게예. ”

“ 아, 그럼요. 종정이도 보고 콩국수 먹으러 가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거기 가서 먹으려고 올해 콩국수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두 주 후에 부인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리턴 콜이 오겠거니 했으나 종일 연락이 없었다.
은근히 걱정이 되어 다음 날 오전부터 몇 번 전화를 해 봤으나 역시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을 넘어 혹시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는데 오후 늦게야
종정이 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 전화를 못 받았습니더. 어제는 종일 병원에 있었고예.
안 그래도 걱정하실 거 같아서 오늘 아침에 전화를 드리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예. “

그 카랑카랑하게 쭉 뻗던 목소리는 간데없고 탁하고 갈라진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목소리 자체에 피로와 병색이 잔뜩 실려 있었다.

“ 그러셨군요. 그렇게 혹사를 하셨으니 몸이 강철로 된 거도 아니고
  지칠 만도 하고 쓰러질 만도 합니다. 지난 13년 간 단 하루도 편히 쉬는 날이 없었으니.
  누구 도우미가 있는 거도 아니고 혼자서 종정이 수발 다 들며
  살림하고 애들 돌보고 야간 일을 하고. 경고가 온 겁니다.
  그 동안 정신력으로 버티신 건데 건장한 장정이라도 벌써 쓰러졌을 겁니다.“

“ 안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제 몸의 기가 완전히 고갈됐다고 하시는 기라예.
  무조건 쉬라카는데 그럴 수는 없고 오늘 하루 더 쉬고 내일은 일 나가려고 합니더.“

“ 아니,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러다가 다시 쓰러지면 이번에는 일어나지도 못 할지 모릅니다.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이번에 눈 딱 감고 컨디션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쉬세요.
  일단 이번 주만이라도 아무 생각 말고 쉬시고 경과를 좀 보도록 하세요.
부인도 부인이지만 부인이 쓰러지면 종정이나 아이들은 어떻합니까?
그런데 종정이 상태가 안 좋다더니 괜찮습니까? “

“ 예, 다행히 병원 다니고 해서 괜찮아졌습니더.
  그 때문에 마음 졸이고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긴장이 풀려서인지 바로 제가 쓰러졌네예.
  고맙습니더. 걱정해주셔서.“

그 다음 주 월요일이다.

“ 며칠 쉬었더니 많아 좋아진 거 같습니더. 잠을 많이 잤어예.
  약이 독해서 인지 약 먹으면 계속 졸리는 기라예.“

“ 아마, 잠을 많이 자게 하는 성분이 들어있을 겁니다.
  기력 회복하는데 잠 많이 자는 거 보다 더 좋은 약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부인은 그 동안 하루에 2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강행군했으니
  잠이 얼마나 모자랐겠습니까? 그러고도 부인이 여태 견딘 거도 기적입니다.
  눈 딱 감고 일주일 더 쉬십시오.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움직이다가 도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부인이 하는 일이 야간 일인데다 노동일인데 잠깐 발이라도 헛디뎌
  계단 같은 곳에서 굴러 떨어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지 않겠어요?
  다 나았다고 하더라도 아직 힘이 실리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

“ 그렇긴 한데...”

부인이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는 뻔하다.
코앞에 바로 닥쳐와 있는 현실 때문이다.

지난 해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동훈이 아들이 장가가는 날은 마침 첫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동훈이 아들 결혼하기 얼마 전 늦가을에 동훈 네에 들렸었으니까
그 이후 반년 이상을 가보지 못했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보는 동훈이는 낯설어하며 반가워 잡는 손을 마주잡아 주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기억을 더듬는지 호기심 가득한 맑은 눈으로
휠체어에 앉은 채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여보, 송 종호씨야. 반갑다, 친구야, 하고 인사 해야지? ”

동훈이 부인이 더 반가워하며 커피와 과일을 내 왔다.

“ 동훈이가 잊어버렸는가 보네요. 그 전에 왔어야했는데 어쩌다보니 반년이 지나버렸네요.”

“ 그래도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바쁘실 텐데. ”

“바쁘긴요. 다 핑계지요. 그런데 동훈이가 호스를 끼고 있는데 뭐가 이상이 있어선 가요?

“ 얼마 전 폐렴이 걸렸더랬어요.
  음식물을 바로 삼키지 못하고 기도로 자꾸 들어가다 보니까 그게 원인이 되어서요.
  의사 선생님이 몇 년 전부터 호스로 음식물을 주입하라고 했었는데
  맛있는 거 먹는 거가 큰 즐거움 중의 하나잖아요?
  그래서 음식을 씹고 맛보고 하는 거라도 갈 데까지 가보자 하고
  섭취할 때마다 조금씩 씹게 하고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이제 한계에 온 거 같아요.
  나이 들어 폐렴이 걸리면 멀쩡한 사람도 위험할 수 있다고 해서요. “

부인의 눈에 금방 물기가 가득 고인다.

“ 항상 건강해 보이시네요. 혼자 계시면서도 건강관리 잘 하시는가 봐요.”

“ 아직까지 어디 크게 불편한 곳은 없습니다만 우리 나이에 장담할 수 있나요?
  60년이 넘도록 써 먹었으니까 언제 어디서 뭐가 터질지 시한폭탄입니다.
  그것도 타임이 세팅 안 된 아주 재래식 고물 폭탄입니다. “

부인과 주고받는 이야기가 별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재미도 없는 이야기라서 짜증이라도 난다는 듯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딴청을 부리고 있던 동훈이가
이 말이 무슨 무의식을 일깨우는 비밀 번호인 거처럼
갑자기 눈이 가늘어지며 입 양 꼬리가 울라가더니 이빨을 다 드러내고
함박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사라져가는 기억을 두드려 일깨운 거다.

“ 동훈아, 이제 알아보는구나. 송 종호야.

함박웃음이 눈가에 물기가 베이고 입이 찢어지는 파안대소로 바뀌었다.  

“동훈아, 우리나이에는 아침에 눈 떠 주변을 볼 수 있으면
아 오늘도 살아있구나 하고 안도해야 하고
그러고서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해야 한 대.“

벌어진 동훈이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눈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 친구가 오니 좋은가 보구나. 그치? 여보.”

이런 동훈이를 바라보며 덩달아 환하게 웃는 부인의 밝아진 표정이
동훈이의 파안대소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오래 고난을 함께 한 부부의 말 없는 교감이라고 할까.
혜인이 부인과, 종정이 부인, 동훈이 부인 그리고 지난 편에 소개한 기수 부인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니다. 그 반대다.
강요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서 싫다고 부정하고 팽개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서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상황을 피하거나 모른 척 하지 않고 그 자체를 적극적으로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였다.

한성이와 열여섯 살 터울의 막내 여동생은 국내 유수의 의류회사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미모의 미혼 디자이너였다.
음악에도 재능이 뛰어나 학교 다닐 때는 성악을 전공하려고도 했었다고 한다.
이런 재능은 다방면의 예능에 출중한 한성이와 무척 닮았다.  
춤추고 노래하고 술도 즐기고 이렇게 흥이 넘치는 끼도 한성이와 닮았다.

그런데 몇 년 전 아이 셋을 둔 바로 위 언니가 대장암으로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자
회사를 그만두고 언니의 간병에 매달렸다.
간병뿐 아니라 조카 셋의 엄마 역할을 대신하고 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는 9순 아버지의 간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 언니가 그렇게 되자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나에게 주어진 인생에서 뭐가 우선인지를 생각해봤거든요.
  언니가 떠나기 전 언니와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고 같이 추억을 만들고 하는 게
  내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인정받고 돈도 벌고 하는 거 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거 같았어요. 아버지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그렇다고 제 시간, 제 인생을 몽땅 그렇게 허비한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러면서 저도 더불어 산거지요 뭐. “

아무도 권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서 장래를 걱정하며 말렸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거는 더더욱 아니었다.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다음 주말에는 21년 전 파라과이에서 타계한 바둑이 영희를 기리기 위해
영희와 친했던 경봉이, 영신이, 성룡이, 종덕이, 윤재 등 동기 몇 명이 모여
조촐하게 추모 연을 하기로 해 토요 살롱도 건너뛰어야 할 거 같다.
미리 양해를 구한다.
2017.07.15. 송 종 호.




토요 살롱 216회 " 기환 엄마 "
토요 214회 " 서울 중학교 두 수재 동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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