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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17-11-18 22:02:18, Hit : 2478, Vote : 580
  토요 살롱 223회 " 1992년 12월 북한산 "

지난 주 중 갑자기 새벽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고 나서 다소 기온이 올라가기는 했지만
쌀쌀한 날이 계속되더니 오늘 아침에는 영하 4도, 낮에도 영하 근방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내일 아침에는 영하 8도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언제 단풍이 들었는지 어쨌는지 구경도 제대로 못 한 거 같은데
어느새 길가에 가로수 은행잎이 수북이 쌓이고 보도를 푹신푹신하게 덮고 있다.

어쩌다 보니 11월도 중순을 넘어서고 있고
11월이니까 아직은 하며 아무 준비도 없이 미적대는 사이,
가을의 정취니 어쩌니 해보지도 못한 채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고 말았다.
한 계절이 지났는데도 뭐라고 딱히 내세울 일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 흔적도 못 남긴 세월만이
과거의 추억으로 묻히고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유난히 짧았던 가을이고 유난히 빨리 찾아 온 겨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나마 기수와의 만남이 지난 가을의 유일한 추억거리가 아닌가 싶다.

기수는 정말 전동 휠체어를 타고 일산 역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눈은 완전히 감겨지고 한 눈은 실눈을 하여
침이 흐를 정도로 이빨을 다 드러내고 입이 귀 뒤에 붙을 정도로 찢어진 채
‘종호야.’ 하고 오른 손을 흔들며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기수의 왼 팔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된지도 몇 년이 더 되는 거 같다.

“ 돼지 내장 등 부속고기 바비큐 전문집이 있는데 괜찮겠니?
  내가 너하고 점심 먹기로 약속했다니까 와이프가 소개해 줬는데 돼지 부속고기 원조집이래.
  니가 좋아할지 어떨지 몰라 어제 미리 한번 와 봤어. 가는 길도 알아둘 겸. “

기수 네에서 일산 역까지는 꽤 되는 거리다.
택시로 기본요금이지만 걷기에는 부담이 되는 거리다.
언젠가 한 번 기수 네에서 나와 택시가 뜸하기에 무작정 기다리기가 뭐해 걸어봤는데
내 걸음으로도 30분은 족히 더 걸린 거 같았다.

“ 점심이야 어디서 먹으면 어때? 역에서 가까운 곳 아무데서나 하면 되지.
  그리고 식당 찾아가더라도 나하고 역에서 만나 같이 가면 되지
  뭐 하러 사전 답사까지 했어.
  집에서 일산 역까지 만이라도 상당한 거리인데. “

기수 와이프가 추천 했다는 돼지 부속 고기 전문 집은 일산 역에서도 한참을 가야했다.
찻길도 지나고 골목길도 지나야 했는데 보도로만 다녀야하는 기수의 전동차는
길을 건널 때마다 난관에 부딪치고 위험에 노출되곤 했다.
건널목의 차도와 보도 사이 턱 때문에 보도로 오르내릴 수가 없어
턱이 없는 곳을 발견할 때까지 한참을 돌아가야 했고
보도에 차를 무단 주차한 곳에서는 보도로 다닐 수 없어 차도로 내려와 차도로 가야 되고
그나마 턱이 있는 곳에서는 바로 차도로 내려 올 수도 없어
턱이 없는 곳까지 되돌아가야만 했다.
이렇게 보도에 차를 올려놓거나 걸쳐 놓은 곳이 비일비재했다.

돌이켜 보니 나도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런 식으로 주차 한 적이 많았었다.
그런데다 기수는 한쪽 팔과 다리가 불편한 건 고사하고
아직 초보운전이라 방향과 속도, 정지, 출발을 능숙하게 조절 못해
보호자가 필요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나하고 점심할 곳이 혹시 어떨까 해서 불편한 몸에 서투른 운전 실력으로
사전답사하기 위해 그 먼 거리를 차도와 보도를 번갈아 가며 위험을 무릅쓰고
다녀왔다고 했다.
아마 성마르고 못된 운전자들로부터 경적도 여러 번 받았을 거다.

기수와의 만남은 언제나 평안이다.
기수의 파안대소와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만은 완전한 relex 상태가 된다. 평화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기쁨이 그 위를 덮으며 안면이 느슨해지고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행복. 기수와 보내는 시간은 행복한 순간이다.

기수와 12시 반에 일산 역에서 만나 1시쯤 음식점에 도착했으니까
아직 한참 점심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음식점 앞이 썰렁한 데다 더구나 홀 안을 들여다보니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잘못 온 게 아닌가? 이 집이 맞는 거 같은데.’
기수가 낙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기야 기수가 기억을 더듬으며 이 집을 찾아오면서도 길을 한두 번 헤맸었다.

그런데 문 한 켠에 조그마하게 붙어 있는 안내문의 영업시간을 보니
영업 시작이 오후 4시부터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저녁에만 영업을 하는 집이었다.
집은 제대로 찾아 왔지만 기수가 영업시간을 간과했었다.

문이 잠겨있지 않아 혹시나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홀 안에 한 아줌마가 맞아주는데
기수를 대뜸 알아보았다.
기수도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며 영업시간을 잘못 알았다고 하고 나가려고 하자
아줌마가 웃으며 음식을 준비해 줄 테니까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또 다시 터지는 조금의 때도 묻지 않고 어떤 계산도 없는 순수하기 그지없는
기수의 함박웃음이다. 안도를 넘어 뭔가 대박을 터트린 순간의 파안대소였다.
순식간에 마음에 꼬인 모든 매듭을 다 풀게 해 주고 뭉친 긴장을 다 녹여주는
최강 용해제 같은 웃음이다.
멀리서 온 나를 잘 대접한답시고 와이프한테 음식점도 추천 받고 사전 답사까지 했는데
순간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리고 반전에 얼마나 기뻤을까.
덕분에 우리 둘이서 홀을 독차지 하고 아줌마의 풀 서비스를 받으며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아줌마도 싱글거리며 부위마다 설명과 함께 부위 별로 특별히 좋은 거만 골라다 주었다.

“ 기수야, 이제 휠체어 전동차로 나다닐 수 있으니까
  다음에는 저녁에 일산 친구들도 같이 보도록 하자. 일산 친구들 본 지도 오래 됐지? “

이번 동기 송년회에 가자고 하니까 전동 휠체어로 장거리를 갈 수가 없고
구지 가려면 누군가가 차로 태워서 가고 오고 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가서 많은 동기들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렇게까지 민폐를 끼치며 갈 수는 없다며 씁쓸해 했다.

“ 그런데 와이프가 저녁에는 못 나가게 해.”

“걱정이 되니까 그러시겠지.
장소를 기수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하고 동국이가 올 때 동행하고
갈 때는 저번같이 다 같이 동행하여 바래다주면 되잖아. “

“ 동국이한테 미안해서.”

“아니야, 동국이가 기꺼워 할 거야. ”

그래서 11월 말로 날짜를 잡았고
동국이는 기수를 자주 찾아보지 못하는 걸 미안해하며
흔쾌히 약속 날 기수네 들러 기수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까 기수가 나들이를 하지 못하게 되어 내가 기수네 집으로 방문하게 되면서
일산 동기들과의 모임이 중단된 지도 벌써 2년쯤 되었다.

“ 종호야, 먼 길 와 줘서 고맙고 내가 점심 값 쏘게 해 줘서 더 고마워.”

“내가 점심 값 내면 다시는 못 오게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지 뭐.
하지만 다음에는 내가 낼게.“

기수와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3시간 정도는 금방 지나가 버린다.
그리고 언제나 마무리는 기수가 암송하는 기수가 작성한 기도문이다.

동 인천 역 북 광장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각종 장식용 조형물이 설치 완료되고  
빨강, 노랑, 파랑, 주황, 초록 등 밤하늘을  화려하게 반짝일 전구들로
촘촘히 치장도 마쳤다.
크리스마스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거다.
때가 때인지라 연말 송년모임 일정이 속속 잡히고 있다.

지지난해 동기회 정기 총회 겸 송년 모임 장소인 이태원 크라운 호텔로 가기 위해
녹사평 전철역에 내릴 때 이미 6시가 넘고 있었다.
예년에는 모임 시작이 7시였으나 그해부터  한 시간을 당긴다고 통지가 왔다.
이미 늦었기에 부지런히 출구로 향하고 있는데
‘어 송 종호’ 하고 뒤에서 누가 불러 돌아보니 찬선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나야 원래 학교 다닐 때도 지각을 밥 먹듯이 한 상습범이지만 선생님이 지각이네?
뭐 바쁜 일이 있었던가 보지?’ 했더니,
겸연쩍게 웃으며,
‘퇴직하고 나서 맹탕 놀고 있는데 바쁜 일은 무슨.
아, 의례 7시인 줄 알고 시간 맞춘다고 집에서 괜히 빈둥거리다
뒤늦게 문자를 들여다보니  6시잖아. 아차하고 서둘렀는데도 늦어버렸어.
나이든 징조가 이런 데서도 나타나네. ‘

녹사평역에서 크라운 호텔까지는 꽤 되는 거리다.
부지런히 걸어도 20분은 족히 걸린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찬선이와 들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누는 이야기라야 뻔하다. 옛날 학교 다닐 때 이야기와 우리 동기들 근황이야기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찬선이가 불쑥,
‘그런데 우리가 북한산 다닐 때가 언제였지?’ 라며 화제를 돌렸다.
‘대선 하던 해였으니까 1992년이었지 아마?’
‘그래? 야, 그게 그러니까 23년 전이었구나.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렇게 지났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갓 마흔 이었을 때네. 맞아.‘
‘나야 그 때 이미 반백에 쭈글쭈글해 50대로 보였지만 다들 새까맣고 풍성한 머리에
얼굴도 탱탱한 청년들이었지. 나야 별로 변한 게 없는데 다들 많이 늙었지 뭐.‘

“아, 그런데 종호야, 더 늦기 전에 토요살롱에 그 때 이야기 좀 써라.
그거 올리면 내가 댓글 푸짐하게 달게. “

찬선이와 그 때 ‘ 아, 그럴까, 그럼 쓸게.’ 하고 약속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자꾸 미뤄지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는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두어 달 전이다.
기수 네에서 내가 인천에서 준비해 간 족발로
기수 어머님과 같이 셋이서 점심을 마치고 기수와 한담을 나누던 중
기수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니면 둘이서만 이야기하다보니까
뭔가 변화를 주고 싶었는지 찬선이에게 전화를 걸어 나에게 바꿔주었다.
기수와 찬선이는 3학년 5반 같은 반이었고 매년 3월 5일에 5반 반창회를 하는데
기수가 총무로 연락을 맡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매번 모임에 담임선생님이었던
안 규 선생님을 모시고 최소 20여명 이상이 참석한다고 한다.

“어 종호, 기수 네에 갔구나.
우리가 자주 찾아보지 못하는데 대신 니가 기수 위로 좀 잘 해 줘라. ”

“무슨 말씀을. 위로는 내가 받아.”

그러다 문득 찬선이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찬선아, 금년 가기 전에 저번에 약속한 북한산 이야기 올릴게.”

“그럴래? 기대할 게.”

미국 이야기를 금년에 마치려고 했으나 다음 주가 우리 동기회 송년 모임이다.
그리고 바로 12월이다.
미국 이야기를 못 마치더라도 찬선이와의 약속은 지켜야 할 거 같았다.

토요 살롱에 5회에 걸쳐 동옥이 생전의 이야기를 쓰며 밝혔듯이
내가 등산을 시작한 건 순전히 동옥이 때문이었다.
1992년 봄에 동옥이의 인도로 도봉산에 올라간 게 첫 등산이었다.
동옥이와 몇 번 다닌 후 산에 좀 적응이 되자 재미가 붙어
일요일이면 의례히 산에 가기 위해 동옥이와 도봉산 입구에서 만났고
동옥이가 다른 일정 때문에 약속이 안 되면
친구들 몇 명을 묶어 관악산, 북한산, 청계산, 남한산성 등으로도 다녔다.

그러다 그해 늦여름 어느 일요일 동옥이와 단둘이 도봉산을 올랐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봉산을 종주하고 우이 암으로 내려와 막걸리 한잔을 나누던 중,

“종호, 너 이제 하산할 때가 됐어. 단계를 높여도 될 거 같아.
동신이, 찬선이, 종면이, 나, 이렇게 넷이서 매주 일요일 새벽 5시에 만나
북한산 등반을 하는데 좀 세게 타. 주로 바위 코스야.
지금 너 정도 실력이면 충분하니 여기 조인해라.“

새벽 5시에 등반을 시작해 8시 30분경에 하산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동옥이가 나하고 일요일 아침 10시쯤 도봉산 입구에서 만나 등산할 때는
밤새 술 마시고 찬선이 등과 새벽에 워밍업으로 북한산을 우선 한탕 뛰며 술이 적당히 깬 후
나하고 도봉산을 또 타며 6시간 종주를 했다는 건데 그런 사실을 그때 처음 알고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하고 등산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술 냄새가 가시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일요일 새벽 5시에 구기터널 입구에서 만난다고 하니까 그 시간에 맞춰 택시를 잡으려면
집에서 4시에는 나와야 됐다.
5시 10분까지 기다리다 누가 안 나타나더라도 성원이 몇 명이더라도 더 기다리지 않고
온 사람만 무조건 출발한다고 했다.
애들 엄마에게 이야기하니까 그 다음날 바로
깜깜한 밤에 등산하는데 필요한 장비들을 죄다 구해 주었다.

이렇게 북한산 새벽 유격 등반대는 동신이, 찬선이, 종면이, 동옥이, 4명으로 시작하여
내가 조인함으로서 5명이 되었다.

구기터널입구에서 계속 왼쪽 길을 택해 가면 북한산 서쪽 끝인 향로봉 초입이 나온다.
향로봉 올라가는 길이 두 갈래다. 우회하여 계곡을 타고 완만하게 올라가는 코스와
거의 직각에 가까운 깎아지른 듯 바위에 박아둔 징을 하나씩 두 손으로 하나씩 번갈아 집고
두발로 번갈아 밟으며 올라가야 하는 험하기 짝이 없는 코스다.
이 바위코스를 택해 향로봉 정상에 오른 후 정상적인 등산 코스를 마다하고
바위 타는 코스만 골라 비봉, 금강 봉, 승가 봉, 문수 봉 정상을 경유하여
보현 봉 정상을 마지막으로 내려오는 코스였는데 동신이가 개발했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보현 봉에서 하산하는 코스가 ‘위험하니 우회하라’는 경고판이 붙어 있는
최 난 코스였다.
보현 봉 정상에서 얼마 내려오면 4,5m는 족히 되는 직각바위가 나타나는데
여기를 내려가려면 겨우 손가락을 3개 끼울 수 있는 바위틈에 대롱대롱 매달려
다리를 뻗어 발을 디딜 수 있는 틈을 확보한 후
바위를 안다 시피하고 몸을 수그려 손 끼울 데를 확보하여
다시 손가락 힘으로 사지를 지탱하고 다리를 뻗어 틈을 찾아 발을 끼우기를 반복해야 했다.
더욱이 바닥도 완전히 바위 덩어리라 혹시 잘못 디뎌 떨어지면
바위와 맞부딪치게 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각 봉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코스가 수두룩했는데
그 때마다 가장 날렵한 동옥이가 먼저 건너고 다음이 동신이, 종면이, 찬선이, 그리고
경력이 가장 일천한 내가 마지막 순서였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찬선이가 한 고백에 의하면,
매주 일요일 새벽에 나올 때마다 자고 있는 아이들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고
비장한 각오를 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바위를 타고 난코스를 지날 때마다
먼저 건너간 동료들의 격려와 코치에도 불구하고 발이 떨어지지 않고 등에 식은땀이 흘렀으나
몇 번 경력이 쌓이고 요령이 몸에 베이게 됨에 따라 차츰 재미가 있어질 뿐만 아니라
그 난코스를 건널 때의 달달 떨리는 짜릿함과 무사히 통과하고서의 상쾌한 안도의 기쁨과
해냈다는 성취감을 즐기는 수준이 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해 가을도 다 지나가고 12월이 되었다.
그 동안 단 한주도 빠지지 않고 새벽 5시에 구기터널로 갔었다.
그리고 김 영삼, 김 대중, 정 주영 3명의 대통령 후보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1992년 12월 첫 주 일요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곧 개이겠거니 하고 그리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단 무조건 5시에 만나서
이후의 행로를 결정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택시를 타고 구기터널로 갔다.
5시 10분 전 쯤 도착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은 동옥이와 동신이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더 굵어지지는 않았으나 가는 줄기의 밀도가 조금씩 촘촘해지고 있었다.
5시 10분이 되었으나 역시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등반에 지장을 줄 거 같지 않았다.
그리고 오기가 생겼다. ‘아니 이 친구들이? 야단 좀 쳐 줘야지.’
‘5시 10분에 무조건 출발’

혼자서 랜턴 달린 밴드를 머리에 쓰고 슬슬 등반을 시작했다.
비 때문인지 등산객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늘 다니던 코스를 따라 향로봉을 넘고 비봉, 금강 봉, 승가 봉, 문수 봉을 거쳐
마지막 봉인 보현 봉에 다 달았다.
가는 줄기의 비는 더 굵어지지도 않고 더 약해지지도 않으면서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이미 3시간째 비를 맞고 있었다.

다행히 날이 푸근해 한기는 없었지만 비에 젖은 탓인지 은근히 지쳐 있었다.
그러나 몸 컨디션보다도 물 먹은 길도 바위도 미끄러웠고 신발도 접착력이 떨어져 있었다.
문수 봉을 지나면서 인적도 끊겨버렸다.
그러나 마지막 봉이었다.
그리고 최 난코스인 바위도 무사히 통과했고 어느 듯 중턱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는 비교적 쉬운 바위 하나만 타고 내려오면 평탄한 하산 길이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너무나 쉬웠던 바위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아내의 얼굴이 획 지나갔다. 미안하다는 생각과 함께.
막내는 태어나기도 전이었고 큰애가 겨우 세 돌이 지났었다.

딱 하고 바위에 세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머리끝까지 확 뻗쳐오는 통증에
‘아악’ 하는 비명이 절로 나왔다. 앞이 새하애졌다.
계속 비명을 지르다 잠시 정신을 잃은 거도 같았다.
안경은 어디로 날아가고 얼굴이고 뭐고 피투성이였다.
오른쪽 다리가 뻐쩡다리가 되어 굽힐 수도 없었고 발을 디딜 수도 없었다.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아무리 소리쳐도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 올뿐
인적이 완전히 끊겼다. 내려갈 길이 막막했다.

늘 다니던 길이라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텐트가 쳐졌던 걸 기억하고 뻐쩡다리를 이끌고
거의 기다시피 텐트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마침 아직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칫솔을 물고 양치물을 든 채 텐트 입구를 제치고 나오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자 깜짝 놀라며 칫솔을 내던지고 우선 짚을 수 있는 나무 막대기를 구해왔다.
어느 교회 청년회에서 기도 수련을 위해 친 텐트인데 주일이라 다들 내려가고
자기만 남았다고 했다.
지팡이를 짚고 청년에 의지하여 몇 발자국 못가 쉬다하며 장시간에 걸쳐
택시를 탈 수 있는 곳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한 후 지철이가 자기 처남이 정형외과 교수라며 처남을 통해
긴급 예약한 한대 병원으로 가서 X-ray를 찍었더니
슬개 골이 박살이 나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
수술해야 한다면 이왕이면 집에서 가까운 곳이 편할 거 같아
압구정동 안세병원으로 옮겼다.

소식을 듣고 북한산 유격대원들이 모두 허겁지겁 병실로 찾아왔다.
그 전날인 토요일 저녁에 나를 제외하고 멤버 모두가 가끔씩 동참하던 방 천환이까지 가세해
신촌에서 만나 술 한잔하다 늦어져 다음날 북한산에 시간 맞춰 오기 위해
다들 여관방에서 합숙을 했는데 여관방에 들어가서도 들고 간 소주병을 까다가
새벽이 되자 지금 자면 못 일어난다며 차라리 밤새 마시고 바로 북한산으로 가자고 하고
계속 마셨다는데 시간이 되어 누가 먼저 밖을 보니까 비가 부슬부슬 오자
‘아니 비가 오네?’ 하니까 그렇잖아도 다들 취해 일어나고 싶지 않은 차제에
누군가가 ‘비 오는데 못 가’ 하자 그 길로 모두 내쳐 자버렸다고 했다.
내 생각은 추호도 못했다고 했다.

동옥이가 제일 미안해했다.
그도 그럴게 동옥이는 여하한 경우에도 누구와의 약속이든 약속은 철칙이었다.
나하고의 약속을 어긴 유일한 경우였다.
그래서 그런지 거의 매일 문병을 왔다.
수술하고 며칠 지나 식사도 정상적으로 할 수 있게 되고 통증도 좀 가라앉자
동옥이가 뭐가 제일 먹고 싶냐 기에 통닭에 시원한 맥주라고 했더니
그 날 밤늦게 마지막 체크 시간이 지나는 걸 기다렸다 병원 뒷문으로
태연이와 함께 맥주 한 박스와 통닭 두 마리를 들고 왔다.

그 사건을 계기로 북한산 유격 등반대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6,7개월 지난 다음해 초여름 재활도 끝나고 오래 깁스를 한 탓에
뼈에 가죽만 붙어 있던 오른쪽다리에 살도 제법 붙었고  
목발 없이도 그런대로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게 되자 제일 먼저 북한산 향로봉으로 향했다.
우선 향로봉 올라가는데 부터 오금이 저렸다.
깜깜할 때는 안보이니까 몰랐는데 밝은데서 아래를 내려 보는 순간 간이 졸아들고
손발을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완전히 절벽 한 중간에 매달려 있었다.
후회 막심했지만 어디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걸 극복하지 못하면 다시는 산에 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를 쓰고 향로봉 정상에 오르자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온 몸의 기력이 다 소진돼
심신이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다.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쉬어야했지만 이후는 그래도 훨씬 수월했다.
보현 봉 사고가 난 바위도 쉽게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3시간 반 코스를 완주하는데 배 이상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해가 뉘엿뉘엿 해서야 하산할 수 있었다. 2017.11.18. 송 종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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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살롱 222회 " 미국의 양당 체제의 성립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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