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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15-11-28 20:34:05, Hit : 2994, Vote : 618
  토요 살롱 163회 " 가 을 비 "

전날 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종일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턱 없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지만 가을비 치고는 아주 길게 빗줄기가 장맛비처럼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끊어졌다 를 반복하며 추적추적 밤을 새워 내리고도 모자라
이튿날 늦은 오후가 되었는데도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아래 간간히 강풍을 동반하며
그 상태 그대로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인천에서 이촌 역은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의 급행 종점인 동 인천에서
반대 쪽 종점인 용산 까지 내쳐 타고 가서 중앙선으로 갈아타고 한 정거장이다.
가다리는 시간을 충분히 감안해도 전철 타는 시간이 채 한 시간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성원이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축하해 주기 위해
공연 시작 30분쯤 전에 도착할 요량으로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이촌 역에서 국립 중앙 박물관까지는 화살 표시와 함께 통로가 이어져 있다.
내가 다니는 온 누리 교회와 가까워 일대 주변은 제법 익숙하지만
국립 중앙 박물관은 10년 전쯤 한 번 가보고 처음이다.
그 때는 개장 초기라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고 전시물이 별 내용이 없었고
경관도 터만 넓게 차지하고 대부분 텅 빈 공터에 주변 환경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는데
기억 속의 그 때 모습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선 건축물들이 엄청난 규모로 변해 있었고
연이어지는 각종 전시를 알리는 포스터와 안내문이 현란하게 걸려 있었고
주변 조경도 잘 가꾸어져 있었다.
해외에 나가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그 나라의 박물관을 찾아 가 보는데
우리 박물관을 한 번 제대로 구경도 못했다는 자괴감도 들고
겉모습이 이렇게 웅장하게 변한만큼 내용물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도 일어
언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꼭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2층 극장을 찾는 데도 좀 헤매야 했다.
2층이라 해서 몇 개로 나누어진 어느 건물 이층인 줄 알았더니 양쪽 건물을 사이에 두고
무슨 고대 문명의 돌 제단처럼 좌우 넓이가 수십 미터는 됨 직하고
높이도 5,6층 규모의 빌딩 정도는 될 거 같은 툭 터진 계단을 끝 까지 올라가서
왼쪽 건물 출입문을 들어 가 이층이었다.
산자락을 깎아 지었기 때문에 평지에서 올라가는 쪽 바닥에서는 6,7층 이고
반대쪽 산등성이 에서는 이층이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계단을 한참 올라가고 있는데
혜열이가 어디쯤이냐고 위치를 묻는 전화를 했다.
혜열이는 지난 해 셀라 밴드 연주회에 우리 동기로는 나 이외에 유일하게 참석했었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그 며칠 전 모임에서 만났을 때 올 거냐고 물었더니 일이 있어 못 온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 아니, 못 온다더니?”

“ 일 팽개치고 와 버렸어.”

우산을 접고 회전문을 열고 들어서자 맨 먼저 연주 복 차림으로 서성이고 있는 성원이가
눈에 들어왔다.

“ 야, 멋있네. 역시 패션니스트야. 폼 난다.”

“ 뭘, 연주자들은 다들 이렇게 입었잖아?”

“ 머플러야, 그 빨간 머플러, 그거 너만 하고 있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혜열이 옆에서 또 뜻밖에도 우리 동기 중 190cm 최장신이자  
기린 목의 기다란 김 재호가 길이와는 달리 조그만 얼굴에 실눈 웃음과
항상 입 양끝이 한껏 올라가 반달 모양을 하고 있는
김 재호 표 미소로 싱글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재호는 살이 쭉 빠져 날렵해 보였지만
지난해인가 마지막으로 볼 때만 하더라도 절대 늙지 않을 거 같았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가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고 새까맣고 풍성하던 머리털도 듬성해지고
흰 머리털도 군데군데 보였다.

“ 어떻게 여기서 만나게 되네? 부인도 잘 계셔?”

“ 애 보느라고. 겸사 겸사야. mantee와 만나기로 했거든.”

모교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재학생과 졸업생을 일대일로 연결해
졸업생이 mantor 역할을 하게 하여 재학생에게 도움을 주자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해 셀라 밴드 연주회 때도 나하고 같은 대학을 다녀서 대학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25회 후배를 우연히 만났는데 어쩐 일이냐니까 mantee를 만나기로 해서라고 했었다.
이 후배는 지금은 변호사를 개업하고 있지만 한 때 명 검사로 이름을 날리며
매스컴의 스타가 되고 세간에 회자되기도 했었다.

“ 그런데 mantee가 엄청 부담이 돼.”

“ 아니 왜? 후배를 위해 좋은 일 하고 있는 거 아니야?”

“ 얘가 지금 고 2인데 전교 일등이야. 전교 일등 애한테 내가 무슨 mantor 역할을 하냐?
  이번 중간고사에서도 또 전교 일등 했대. “
좀체 실눈과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자기 분야에 대해서는  확신에 차 있는 재호가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난감해  하는 모습을 나는 처음 봤다.

전교 일등에게 반에서 10등도 어려웠던 졸업생 mantor라,
재호의 곤혹스러움이 그대로 전달되는 거 같았다.

하기야 공부하기 싫어하고 반항적이고 뭔가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게나 mantor가 필요하지
전교 일등 모범생에게  mantor라니 뭐가 잘못 된 거 같다.

그러고 있는 사이 재호의 mantee는 전교 일등 모범생의 이미지와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으로
불쑥 나타났다.
재호와 거의 비견할 정도로 기다란 길이에 체격도 제법 늠름하고 비록 안경을 쓰고는 있지만
그 나이에 보통 있을 법한 여드름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의 허여멀쑥하게 잘 생긴 녀석이었다.

재호 옆에는 재호 보다는 작지만 나 보다는 커 보이는 앞이마가 훤한 왠 낯선 중늙은이가
재호와 나를 데면데면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 나, 송 종 호인데..” 하고 말 끝을 흐렸더니,
“ 아, 니가 송 종 호구나. 니 이야기 많이 들었어. 나는 김 종 덕 이야.”

우리는 초면이지만 이름을 서로 알고 있을 정도가 아니라 전화 통화도 한번 한 사이였다.

2년여 전인 2013년 이른 봄, 바둑이 영희의 부인인 애희 씨의 연락처를 알기 위해
영희와 가까웠던 친구들과 두루 전화하며 수소문 끝에
김 종 덕 이가 가장 최근에 파라과이에서 영희 가족을 만났고
외아들 기환이의 후견인 역할도 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을 거라고  하여
종덕 이와 통화를 하고 연락처를 받았었다.
그리고 지난여름 영희 20주기 모임에 종덕이가 깜빡하고 못 나왔다고 하며 대신 벌주로
한 잔 쏘겠다며 날을 잡았는데 그 때는 내가 선약이 있어 못 만나 서로 엇갈렸었다.

커피 한잔을 마시는 사이 공연 시간이 다 되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 안내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자 바로 옆줄에 미리 들어와 자리를 하고 있던 갑섭 이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연주 시작 직전에 뒤늦게 도착한 치걸이가 특유의 만년 소년 웃음을 머금고
우리 자리로 찾아왔다.
그리고 중간 휴식 시간에는 세민이도 만났는데 부인과 같이 왔다고 했다.

이전 연주는 지난해보다 여성 연주자들이 대폭 늘었고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경기고 OB 밴드에서도 몇 명이 우정 출연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연주가 지난해보다 더 웅장해졌다.
어디 전국 대회에 출전하여 장려상도 받았다는 데 내년에는 입상이 목표라고 한다.

밴드의 반주에 맞춰 교가 3절을 부르는 걸로 공연이 끝나니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비는 아직도 추적거리고 있었다.
성원이 부부와 아들, 세민이 부부, 종덕이, 치걸이, 혜열이, 나, 이렇게 미리 지정한
뒤풀이 장소인 닭갈비 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 셀라 밴드라는 이름을 내가 지었지. 너희 24회가 최고야.
  봐, 어느 기수도 이렇게 한 자리를 차지한 곳이 없잖아?”

셀라 밴드의 클라리넷 주자이시며 초대 악 단장을 맡아 지난해까지 단장으로 수고하신
17회 선배님이시다.

“ 선배님, 저는 선배님이 주관하는 곳은 다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마라톤도 3회부터 벌써 네 번 하프 뛰었고 성원이 땜에 셀라 밴드, 인왕 음악회,
  다 쫒아 다닙니다. “

“ 니가 내 팬인 거지. 그나저나 말이야. 세 군데 일 년에 각 천만 원씩 내니까
  매년 3천만 원이 나가는데 돈 벌어서 이거 하는데 다 들어가고 있어. “

셀라 밴드의 플루트 주자이며 금년부터 동문 가족사랑 마라톤 대회와 인왕 음악회에 이어
셀라 밴드 단장을 맡은 21회 허 만회 선배이시다.

11월 24일 저녁 늦게부터 비 예보가 있었다.
그날따라 점심부터 서울에서 줄줄이 약속이 있어
새벽에는 보름달에 가까운 달빛이 훤했고
아침에도 설마 이런 하늘인데 비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파란 하늘인데도
우산을 챙겨들고 일찌감치 서울 행 전철을 탔다.
하루 종일 그러고 다녔지만 하늘은 여전히 파랬고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우리 동기회 총회 겸 송년 모임은 주말과 겹치지 않는 한 언제나 11월 24일이다.
겹치면 그 전날이나 그 다음날이기 때문에 미리 예측할 수 있다.
년 초가 되면 매년 루틴하게 다니거나 참석해야 하는 날을 미리 표해 두고
임의로 생기는 약속들은 그 날들을 피해서 잡는다.
그래서 우리 동기 모임도 불가피한 돌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항상 참석할 수 있다.
고 이 동순 이를 초대 회장으로 뽑은 첫 동기회부터 지금까지 내가 해외에 나가 있던 기간과
해외 출장으로 참석하지 못한 경우를 제외하고 빠진 경우가 거의 없다.

입구에서 우리의 영원한 엔터테이너 철홍이가 창 넓은 파나마모자에 무대 의상을 받쳐 입고
반갑게 맞으며 우산을 받아 든다.
참가 번호 44 번을 건네주면서 ‘어, 이거 행운의 숫자 아니야. 오늘 기대해 보자.’
연회장 안에는 이미 많은 동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손을 흔들며 반겨 줬다.
이번 동기회에 74명이 참석했다. 종문이가 마지막 번호였다.
잘 차려진 뷔페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성이의 사회로
본 회의를 시작했다.
금년 총회의 주제는 회장단의 바통 터치다.
지난 봄 가족 마라톤 대회에 격려 차 나온 완진 이가 차기 회장을 찾지 못해서 초조해 하기에
‘없으면 한 번 더 하는 거지 뭐. 종신 회장을 하던가.’ 했더니,
‘ 아니, 농담을 해도.’ 하며 거의 울상을 지었지만
두어 달 전에 만났을 때는 다행히 차기 회장을 맡아 줄 동기가 나타났다며
시름을 들었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좋아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임 회장으로서 마지막 인사말을 하고 차기 회장에게 회기를 전달하는
완진이의 태도와 말에 힘이 있고 유머가 넘치고 여유가 있었다.
회기를 깜빡 잊고 못 가져왔다며 그냥 시늉으로 전달하는 제스처가 답지 않게 연극배우 같아
폭소를 자아냈다.
지난 2년 동안 수고를 아끼지 않은 완진 이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이어진 악동들 연주는 콩가 연주와 보컬의 동원이, 기타에 명환 이와 성원이 달랑 셋이었다.
지난해는 드럼을 27회에서 꾸어 와서 그런대로 구색을 맞추었는데
금년에는 악단 구성상 좀 빈약한 감이 있었지만 그 모자라는 부분을 동원이의 명품 보칼,
프로 이상의 콩가 연주, 간간히 동원이의 보칼을 받쳐 주는 성원이의 소프라노가
채워주고도 남았다.

그 며칠 전 성원이네 치과에 들렀을 때다.

“ 24일 올 거야?”

“ 그럼, 악동들 연주 듣기 위해서라도 열일을 제치고 가야지.
  이번에 악동들 연주 멤버는 어떻게 돼?

“ 동원이, 명환이, 나, 달랑 셋이야.”

“ 재문이는 대만에서 아직 안 왔어?”

“ 왔는데 연습이 부족해서.”

동원 이에게도 응원 전화를 했다.

“ 동원아, 응원할게.”

“ 야, 고맙다. 이런 격려 전화는 처음 받아 본다.
  이번에 연주 멤버가 부족한 대신 색다른 프로그램을 넣으려고 해.
  영석이 알지? 영석이가 수술 후 매사에 아주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야.
  그래서 영석이에게 솔로로 한곡 부르게 하고 다 같이 부를 수 있는 곡으로 몇 곡
  싱 어롱도 순서에 넣으려고.“

경품 추첨은 항상 그렇듯이 철홍 이의 독무대다.
내가 여태 봐 온 철홍 이의 사회 중 이번이 최고였다.
나이가 들수록 철홍이의 순발력이 더해가고 양기가 점점 위로 올라와 세치 혓바닥으로
집중되는 거 같다.
철홍이의 만담과 재기 발랄한 사회로 웃음이 만발하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회장단의 배려로 여늬 때와 달리 참석자 전원이 한 가지씩 경품을 받을 수 있었다.

교가 제창을 마지막으로 참석자 전원에게 나눠 주는 장식이네 회사 내년도 달력과
화 과자 한 상자 씩 받아들고 밖을 나서니 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오는 길에 철홍이가 싱글거리며 들어갈 때 받아 둔 우산을 잊지 않고 챙겨주었다.
혹시 지난해처럼 근처 생맥주 집에서 한잔 더 할 친구들이 있으려나 하고
옆에 있는 기영 이를 돌아봤더니,
‘ 재수도 튀었잖아. 너하고 나밖에 안 남았으니 오늘은 그냥 가자. “

버스를 타고 신용산역에서 내려 용산 역에서 동인천행 급행을 탈 때까지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밤공기가 찬 수증기를 잔뜩 품고 있었다.
종점인 동 인천 역에 내리니 제법 굵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가을비였다.
2015.10.28. 송 종 호.




토요 살롱 164회 " 낙엽도 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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